[아이뉴스24 김주훈 기자] 22대 국회 개원 이후 줄곧 충돌을 벌여온 여야가 모처럼 손을 잡고 '민생 법안'을 처리했다. 각을 세울 정쟁 법안이 없자, 국회 본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자당에 대한 비판이 나와도 항의와 야유를 보내지 않는 모습이 처음으로 연출됐다.
국회는 이날 이른바 구하라법으로 불리는 민법 개정안을 비롯해 간호법, 전세사기 특별법 등 28건의 민생법안을 처리했다.
먼저 '구하라법'은 양육의무를 불이행한 친부모에 대해선 상속을 제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걸그룹 카라 출신 가수 구하라 씨가 지난 2018년 11월 세상을 떠난 이후, 20년간 연락이 끊겼던 친모가 장례식장에 나타나 고인의 부동산 매각 대금 절반을 요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현행법상 이를 제재할 수 없었고, 정치권도 법안 발의에 열을 올렸지만 20·21대에선 정쟁에 밀려 폐기된 바 있다.
이번에 통과된 법은 피상속인의 직계존속으로서 상속인이 될 사람이 피상속인에 대한 부양의무를 위반하거나 중대한 범죄행위, 부당한 대우를 했을 경우, 피상속인의 유언 또는 공동상속인의 청구에 따라 가정법원이 상속권 상실을 선고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 법적 테두리 안에서 보호받지 못한 간호사의 업무와 특성을 명문화한 '간호법 제정안'도 본회의에서 통과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적인 간호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지만, 현행 의료법에는 간호사의 업무와 특성을 구체적으로 규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지적됐다. 이에 간호사 역할을 명문화해 의료 행위를 법적으로 보호해야 한다는 것에 여야는 공감대를 형성했다.
쟁점 사안이었던 PA간호사의 구체적인 업무 범위는 보건복지부령으로 정하기로 했다. 또한 간호사와 간호조무사 협회를 법정단체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명시하는 한편, 근무환경과 처우 개선을 요구할 권리와 무면허 의료행위 지시를 거부할 권리 등 간호사 권한이 대폭 향상됐다. 다만 간호조무사 단체에서 요구한 시험 응시자격 기준 확대(전문대 졸업생 추가)는 야당의 반대로 법안 내용에서 제외됐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전세사기 피해 주택을 경매로 매입해 피해 세입자에게 주택을 장기 공공임대하거나 경매차익을 지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전세사기 특별법'(전세사기피해자 지원 및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 일부개정법률안)은 만장일치로 국회를 통과했다.
앞서 지난 2023년 6월 관련 법률이 제정돼 시행되고 있지만, 피해자 인정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거나 현실적으로 적절한 지원과 보호를 받지 못하는 피해자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지적이 나오자,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미흡한 부분을 보완하고 개선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전세사기피해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요건 중 임차보증금의 한도를 3억원에서 5억원으로 상향했고, 나아가 피해지원위원회에서 자체적으로 2억원의 금액을 추가로 인정할 수 있어 최대 7억원 구간 세입자까지 피해를 인정받을 수 있게 됐다. 또한 이중임대차계약으로 피해를 입은 피해자도 지원하는 등 피해자 인정 범위도 확대됐다.
피해자들의 주거안정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전세사기피해주택 및 신탁사기피해주택과 관련해 공공임대주택을 활용하기로 했다. 피해자들은 LH가 제공하는 공공임대 주택에서 기본 10년 동안 거주할 수 있으며 나아가 기간을 연장할 경우에도 시세 대비 낮은 비용으로 최대 10년 추가로 거주할 수 있게 됐다.
여야 원내대표는 이날 우원식 국회의장 주재 회동에서 합의된 민생 법안을 처리하는 한편, 대통령 재의요구권(거부권)이 행사된 법안에 대한 재표결은 다음 달 26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국회의장실은 비공개 회동 이후 기자들과 만나 여야 합의에 대해 "22대 국회 임기 시작 이후 여러 갈등 양상이 많았던 만큼, 민생법안 등이 포함된 28개 법안에 대한 합의 처리와 그 정신을 국민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2대 국회 개원 이후 본회의는 줄곧 쟁점 법안만 상정돼 고성이 오갔지만, 각을 세울 필요가 없는 민생 법안만 올라온 본회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법제사법위원회 여당 간사인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이 법안 제안 설명을 위해 의장석 앞으로 나왔지만, 우 의장이 호출하기 전 먼저 나온 탓에 장내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 의장은 "너무 빨리 나왔다"며 "뒤에는(저한테는) 인사 안 할 것인가"라고 말했고, 유 의원은 "오면서 벌써 했는데, (못 봤다면) 다시 하겠다"며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다시 나왔다.
법안 처리 이후 이어진 의원들의 '5분 자유 발언'에서도 여야 '화해 모드' 기조는 유지됐다. 의원들은 상대 당을 향한 비판을 쏟아냈지만, 주요 법안이 처리된 직후 대부분의 의원이 자리를 떠난 것을 감안하더라도 야유와 고성은 나오지 않았다.
우 의장은 앞선 여야 원내대표 회동에서 "22대 국회 임기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여야 합의를 통해 다수의 법안을 처리하는 날인 만큼, 본회의를 맞이하는 저도 아주 기쁜 마음으로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 맞춰 우 의장은 산회 직전까지 미소를 유지하며 본회의를 마쳤다.
여야도 이번 '민생 법안' 처리에 대해 '협치의 결과물'이라고 평가했다.
곽규택 수석대변인은 이날 논평을 통해 "민생을 위한 협치는 계속되어야 한다"며 "모처럼 트인 여야 협치의 물꼬가 계속 이어지길 기대하고, 오늘 여야 합의로 처리하는 민생법안을 시작으로 대표 회담까지 협치의 분위기를 계속 이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유정 원내대변인은 브리핑을 통해 민생 법안과 관련해 여당의 의견을 반영하기 위한 노력을 취했다고 부각했다. 강 원내대변인은 "간호법의 경우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됐음에도 협의를 통해 법사위까지 통과시켰고, 긴박한 과정에서도 여당의 의견을 많이 반영했다"며 "민생을 생각해 어려움에 처한 분위기에 출구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정쟁 또는 논쟁적인 사안이 없어 본회의 일정도 제법 신속하게 마무리됐다"고 평가했다.
여야 간 화해 분위기는 다음 달 2일 22대 국회 개원식 겸 2024년 정기국회 개회식까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우 의장은 그동안 여야 신경전에 진전되지 못한 개원식을 두고 안타까움을 줄곧 드러냈고, 결국 이날 여야 원내대표를 향해 "9월 2일 실시할 방침"이라고 통보했다. 이에 여야는 큰 이견과 반대 없이 수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정기국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여야 갈등은 다시 불붙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여야 앞에 놓인 쟁점은 다음 달 26일 예정된 방송4법과 전국민 25만원 지원법, 노란봉투법 등 대통령 거부권이 행사된 법안에 대한 재표결이다. 특히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4·10 총선 공약인 전국민 25만원 지원법에 대한 당 차원의 집중 압박이 이어질 전망인 만큼, 여당과의 충돌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박 원내대표는 국회의장 회동에서 "여당이기 때문에 민생 회복 지원금을 무조건 반대만 하지 말고 민생 회복을 위해 동참해 줬으면 좋겠다"며 "여당이 민생을 살리는 정책에 적극 나서면 국민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않겠나"고 압박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아이뉴스24>와의 통화에서 "25만원 지원금이 오늘 본회의에 올라가지 못한 것은 개인적으로 아쉽다"며 "여야 합의와 협상을 통해 오늘 민생 법안 처리처럼 추진되면 좋겠지만, 현재 상황에선 어려운 만큼 재표결에서 관철할 수 있도록 필요성을 계속 압박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반면 추 원내대표는 "단순 현금살포법이라고 지칭하고 있지만 이런 실효성 없고 미래 청년에게 막대한 빛을 남기는 법안은 거둬달라"며 "실질적인 우리 민생 지원을 위해 취약계층을 지원하는 정책 논의가 되길 기대한다"고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김주훈 기자(jhkim@inews24.com)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