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정종오 기자] 들어갈 땐 하나의 문이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미로다. 나올 때는 출구가 어디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할지 분간할 수 없다. 혼자서는 찾을 수 없다. 옆에 있는 동료와 머리를 맞대도 출구를 찾기란 쉽지 않다. 미로 속에 갇히면 불안과 혼란, 동료와 갈등만이 튀어나올 뿐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여러 출구전략을 찾아야 하는 숙제를 떠안았다. 과기정통부 수장이 바뀌었다. 과기정통부 ‘유상임 캡틴’이 찾아야 하는 출구전략은 한둘이 아니다.
유상임 과기정통부 장관 취임식이 지난 16일 있었다. 과기정통부 문을 당당히 열고 들어섰다. 과기정통부는 지금 미로를 걷고 있다. 대내적으론 연구개발(R&D) 갈등과 예비타당성(예타) 폐지 후폭풍, 선도적 R&D 체계로 전환, 3대 게임 체인저 전략 등 온갖 미로가 펼쳐져 있다.
대외적으론 선진국과 기술격차 해소, 글로벌 R&D, 탄소중립, 우주 협력 등 또 다른 미로가 기다리고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출구전략이다. 미로 속에서 과기정통부 직원을 비롯해 좁게는 과학기술계 관계자, 넓게는 국민과 함께 가장 빠르고 현명한 출구를 찾아야 하는 숙제를 떠안았다.
◇출구전략① R&D 갈등=이종호 전 장관 시절 정부는 ‘R&D 카르텔’ 등을 거론하며 국가연구개발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과학기술계는 충격으로 받아들였다. 이종호 전 장관은 과기정통부를 떠나면서 “국가 R&D 혁신 시스템을 재설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R&D 예산 삭감보다는 ‘혁신’에 무게를 뒀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유상임 장관도 취임사를 통해 “선도형 R&D시스템으로의 체질 전환을 조속히 완료하겠다”며 “R&D 예산의 낭비 요인을 제거하고 국가전략기술 확보, 미래 성장동력 발굴, 글로벌 공동연구, 인재양성 등을 골자로 하는 선도형 투자 포트폴리오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국가 R&D 혁신 시스템’ ‘선도형 R&D 시스템’에 대한 공감대가 부족하다는 데 있다. 한 원로 과학기술계 인사는 “정부가 R&D 혁신과 선도형을 강조하는데 그 부분을 문제 삼는 게 아니다”며 “‘그동안 무엇이 문제였고,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사전 정지 작업은 물론 설명과 설득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유 장관은 이 같은 R&D 미로 속에서 ‘혁신적이고 선도형 R&D 시스템’으로 나가야 하는 배경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소통해야 한다. 과기정통부 직원·국민과 함께 ‘혁신·선도형 R&D’ 미로 속에서 출구전략을 찾기 위해서는 공감대가 무엇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계의 사기 저하도 심각하다. 이종호 전 장관은 이임사에서 “선도형 R&D 체제로 바꾸는 과정에서 R&D 예산 축소가 있었고, 과학기술계가 어려움을 겪게 된 것에 대해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소회했다.
장관에 임명되기 전에 서울대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했던 유상임 장관도 인사청문회와 취임사 등에서 “최근의 R&D 예산 편성 사태와 관련해 과학기술계와 소통이 부족했던 아쉬운 점이 있었다”고 판단했다.
유 장관은 “앞으로 각계각층의 전문가들뿐 아니라 현장의 연구자들과 적극 소통해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R&D 예산이 반영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강조했다.
과기정통부 한 고위 관계자는 “유상임 장관은 서울대 교수로 있으면서 R&D의 현실과 구체적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분”이라며 “선도·혁신형 R&D 시스템으로 체질 개선을 하는 과정에서 이 같은 유 장관의 현실 경험과 리더십이 빛을 발하지 않겠느냐”고 전망했다.
◇출구전략② R&D 예산 회복=내년도 국가연구개발사업 예산 배분·조정안을 보면 주요 R&D 예산은 올해보다 대폭 증가한 24조8000억원 규모로 편성될 예정이다. 주요 R&D 예산은 2023년 24조7000억, 올해는 21조9000억원이었다. 올해 대폭 삭감됐던 예산이 내년엔 회복되는 셈이다.
정부는 2025년도 주요 R&D 중점투자 분야로 △3대 게임체인저(AI‧반도체, 첨단바이오, 양자과학기술)를 들었다. 여기에 우주, 혁신도전형 R&D 1조원 시대를 열어젖히고 기초연구에 역대 최대인 2조9400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두고 과학기술계에서는 내년에 대폭 확대했다는 표현보다는 2023년 수준으로 회복됐다는 표현이 맞다고 지적한다. 이런 상황에서 유상임 장관이 헤쳐 나가야 할 미로는 분명해 보인다. 혁신과 성장뿐 아니라 저변확대에 대한 고민도 뒤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혁신과 성장이란 틀에만 묶이다 보면 저변확대는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다. 잘되는 기술에만 올인하다보면 기초과학이 흔들리는 상황을 맞는다. 과학기술계가 ‘부익부빈익빈’에 노출될 수 있다는 거다.
R&D 예산 대폭 삭감은 일어난 일이고 2023년 수준으로 회복된 만큼 이젠 이를 어떻게 운용할 것인지의 문제로 직결된다. 과기정통부가 어떤 정책으로 R&D 회복의 출구전략을 만들지 주목되는 부분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R&D 예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글로벌 R&D를 어떻게 운용하느냐다. 유상임 장관은 취임사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기술 선도국과 연대해 세계 무대의 주요 국가로 확고히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글로벌 R&D를 확대하겠다”고 강조했다.
선진국과 글로벌 R&D를 추구할 땐 기술격차에서 아래에 있는 나라는 ‘을’의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즉 글로벌 R&D에서 돈은 돈대로 쓰고 기술 확보는 되지 않는 ‘늪’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과학기술계 관계자는 “글로벌 R&D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출구전략”이라며 “어떻게 각국과 연대해 우리에게 필요한 기술을 국내로 유입할 것인지, 이를 통해 우리가 어떤 시스템으로 탈바꿈할 것인지 면밀한 전략 없이는 영원한 ‘을’의 처지에 머물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 출구전략에서도 유상임 장관의 리더십이 필요한 상황이다. R&D 예산 회복과 글로벌 R&D에서의 이 같은 출구전략을 마련하는데 유 장관의 현장 경험이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유 장관은 “미국, 유럽연합(EU), 일본, 중국 등 기술 선도국들은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AI를 비롯한 전략기술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며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을 중심으로 협력의 장벽을 쌓는 기술 블록화 현상도 심화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유 장관이 심화하는 기술 블록화 현상에서 우리나라가 어떤 출구전략을 짤지 고민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출구전략③ 잦은 예타 변경=예타 제도는 정부가 예산을 허투루 쓰지 않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대규모 예산이 들어가는 사업은 사전에 타당성을 조사해 국민의 혈세를 투입해도 될 것인지를 심의하고 논의하는 제도이다.
과기정통부는 그동안 R&D 예타 제도를 지속해 개선해 왔다. 대형 R&D는 기획부터 착수까지 지나치게 시간이 오래 걸려 예타의 근본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전문가 의견이 나왔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 5월 17일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 R&D 예타 폐지 방침을 발표했다. 이어 6월 4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심의회의를 통해 후속 조치 방안을 마련해 현재 이행을 위한 절차를 추진하고 있다.
예타가 폐지되면 빠른 시간에 예산 집행이 가능한 것 등 여러 장점이 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몇몇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사업만 추진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데 있다. 즉 이권과 특권이 개입할 여지가 많다는 거다.
과기정통부도 이 같은 부작용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과기정통부 측은 “R&D 예타 폐지 후에도 사업의 기획 완성도를 높이고, 재정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해 기술 분야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사전기획 점검제, 맞춤형 검증제도를 도입할 예정”이라며 “도입 과정에서 관계 부처, 현장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해 세부 추진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유 장관은 과기분야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전문가로 그 누구보다 R&D 예타가 가진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현장 경험이 풍부하고 전문가 과정을 거친 과기정통부 수장으로서 R&D 예타 폐지에 따른 출구전략은 어떤 모습이 될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를 염두에 둔 듯 유 장관은 취임사에서 “R&D 예산을 필요한 만큼 신속하게 지원하기 위한 R&D 예타 조사 제도 폐지와 이에 따른 보완책을 적기에 안착시키겠다”고 말했다. ‘보완책’을 가능한 한 빨리 만들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출구전략④ 우주항공청 연착륙= 올해 5월 경남 사천에 우주항공청이 개청했다. 윤석열정부가 대통령선거 당시부터 약속했던 ‘경남 사천=우주청’이 현실화됐다. 과기정통부 외청임에도 우주청은 독립적 예산, 자체 인력확보 등 독립적 기구의 성격도 가진다.
이 과정에서 과기정통부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우주청 연착륙에 큰 역할을 할 것이란 의견이 많다. 우주청은 개청한 이후 현재 인력확보에 매진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최근 불거진 한국항공우주연구원과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사이 불거진 지식재산권 다툼은 초미의 관심사다.
항우연은 계약대로 지재권에 대한 우선권이 있다고 주장하고 한화에어로스페이스는 차세대발사체 체계종합기업으로 선정된 만큼 지재권에 대한 공유는 물론 권리도 있다고 맞서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주청은 “양측(항우연과 한화)과 충분히 논의해 가며 우리나라 미래 우주항공 기술력과 산업경쟁력 확보 차원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합의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 나가겠다”는 원론적 견해만 내놓았다.
우주 관련 전담 조직인 우주청의 사태 해결 대책으로 내놓은 것 치고는 너무나 원론적이다. 문제가 불거졌다면 우주청이 적극적 정책 등으로 풀어가고자 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이종호 전 장관은 이임사에서 “우주청이 자리 잡도록 적극 도와야 한다”라고 주문한 뒤 과기정통부를 떠났다. 외청의 한계는 분명하다. 외청은 자체적으로 법령을 만들 수 없다. 과기정통부가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상임 장관은 취임사에서 우주를 언급하지는 않았다. 외청이 있는 만큼 알아서 잘해 줄 것이란 믿음의 표현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멀리 떨어진 우주청이 연말까지 293명의 직원을 모두 확정하고 연착륙할 수 있는 출구전략 마련에도 유 장관의 몫은 크다.
유 장관이 어려운 시기에 장관직에 임명됐다는 것에 과학기술계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대를 표현했다. 이는 해야 할 일도 많고, 만나야 할 관계자도 수두룩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다른 과학기술계 한 원로는 “현명한 출구전략을 찾는 게 유상임 장관이 해야 할 가장 우선순위”라며 “현장 경험이 풍부하고 전문가로서 인정받고 있는 만큼 과기정통부 ‘캡틴’으로서 합리적이고 건강한 출구전략을 찾아내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가능하다면 최근 불거진 여러 이슈에 대한 출구전략 TF를 운영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유 장관은 취임사에서 ‘과기정통부는 모든 부처와 민간의 역량을 결집해야 하는 과학기술·디지털 플랫폼 부처’라고 자처했다. 모든 부처와 국민 역량까지 결집하는 중요한 부처의 수장으로서 어떤 출구전략을 고민하고 있는지 과학기술계의 시선이 집중되고 있다.
/정종오 기자(ikokid@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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