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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박지영 컴투스 사장


 

안녕하세요, 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코너입니다. 엔지니어로 출발,성공적으로 벤처기업을 일궈낸 지어소프트 한용규 사장의 창업기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정말 열정적으로 사업을 하는 CEO 입니다. 전문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면서 컴투스를 이젠 글로벌기업으로 키워내고 있죠” 두 사람은 모바일과 관련한 사업을 하는 관계로 만나, 이제는 서로 많은 사업적 조언을 해주는 비즈니스계의 선후배라고 합니다.

박지영 사장의 경영능력이 어느 정도이고, 어떤 노하우를 통해 성공반열에 올랐는지, 그의 창업이야기를 소개합니다.


“국내는 좁다. 이젠 글로벌 승부다”

모바일게임 하나로 국내는 물론 세계적 휴대폰서비스업체를 잇따라 뚫으면서 120억원대의 연매출을 기록중인 토종 벤처기업이 등장, 또한번의 성공신화를 예고하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모바일게임 하나로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있는 컴투스. 이미 국내 시장을 석권한 컴투스는 최근 글로벌 시장의 천하통일을 선언, 국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실제 컴투스는 최근 유럽내 최대 휴대폰서비스업체인 보다폰사를 비롯해 중국 차이나모바일, 스페인 텔레포니카, 독일 티모바일, 미국 버라이존, 프랑스 오렌지 등 세계적 모바일서비스업체와 잇따라 공급계약을 맺고 전세계 14개국에서 모바일게임을 서비스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일본, 유럽 등의 메이저 게임개발회사들이 잔뜩 경계에 찬 눈으로 컴투스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도 컴투스의 이런 발빠른 행보 때문.

국내 모바일게임시장의 거인으로 통하는 컴투스 박지영(30) 사장. 구로공단내 새로 입주한 사무실에서 만났다. 박 사장은 매우 적극적인 CEO다. 늘 먼저 악수를 청할 만큼 활달하다.

박 사장의 첫 인상은 장난기 많은 대학생같은 느낌. 작은 키에 짧은 단말머리는 아직도 캠퍼스 분위기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당차고,자신감 넘친다.

편안한 말투와 솔직담백한 대화기법이 눈길을 끈다. 박 사장을 처음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험한 비즈니스세계에 전혀 어울릴 것같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박 사장은 벌써 창업 7년째를 맞는 중견 CEO다. 속된 말로 얼추 산전수전 다 겪은,그래서 이제는 간단치 않은 경영수완을 자랑한다.

컴투스 박지영 사장하면 모바일게임 사업만을 떠올리지만, 그 역시 PC통신시절 IP사업부터 시작해 수많은 사업아이템으로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으며 부침을 거듭해온 과거를 갖고있다.

글로벌 비즈니스, 조직관리에 대한 남다른 고민, 컴투스의 비전을 제시하는 박지영의 모습은 모바일게임 사업의 성공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새삼 느끼게 한다. 미래를 바라보는 높은 식견과 사업확장에 대한 나름의 견고한 철학, 여기에 여성특유의 섬세한 터치와 감각을 쏟아낸다.

박 사장은 매우 자신감이 넘친다. 이젠 글로벌비즈니스에 대해서도, 조직관리와 비전이 넘치는 기업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에서도 그는 넘치는 자신감과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가녀린 여성 CEO이지만 이젠 두둑한 배짱도 엿보인다.

98년 설립된 컴투스는 국내에서 모바일게임을 가장 먼저 제공한 벤처기업. 지난해 30억원의 매출을 기록했지만, 올핸 상반기에만 벌써 50억원을 훌쩍 넘었다. 연말까진 120억원의 매출이 무난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내년에 코스닥에 도전할 계획이다.

◆ 대학생 CEO

“야,재미있는 거 해보고,안되면 취직하자” 불볕더위가 한창이던 98년 여름,서울 안암동 고려대 캠퍼스.대학 4학년인 박지영은 마지막 학기를 앞둔 여름방학중 같은 학과 친구 2명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컴퓨터학과 출신들이라 일단 취업에는 전혀 문제가 없는 점을 감안,취업 전에 하고싶은 일을 한번 해보자고 의기투합한 것.입사원서 넣기 전에 한번 해보고 안되면 취업하자고 약속했다.

“컴퓨터학과를 택한 것은 사실 누구보다 세상을 앞서갈 수 있을 거란 생각때문이었죠. 헌데 막상 선배들을 보면 대부분 프로그래머예요.프로그래머로는 세상을 바꾸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박지영 사장과 이영일(컴투스 이사),현유진(컴투스 차장) 3명은 98년 8월, ‘안되면 말지’라는 가벼운 생각으로 그렇게 회사를 창업했다. 세명은 보문동에 20평 남짓한 옥탑방을 사글세로 얻어 사무실을 냈다.각자 500만원씩 추렴했다.

사실 박지영과 이영일 등 핵심멤버들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준비된 창업자들이었다. 이영일이사의 경우 PC통신 하이텔에서 하드웨어동호회 시숍을 맡을 만큼 활동적이었다.

박 사장도 마찬가지.멤버들은 이미 잡지 필자로 활동하거나,케이블TV 방송에 출연,패널로 출연하는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통해 여느 대학생과는 달리 보는 IT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앞선 정보를 갖고 있었다.

필연적으로 시야도 넓어졌고,훗날 사업에 필요한 창업아이템을 선택할 수 있는 감각도 키워가고 있었다. 특히 이영일이사의 경우 아이디어도 많고 정보력도 매우 뛰어났다.

당시 그들이 생각해낸 첫 사업아이템은 MP3 플레이어.당시만 해도 MP3파일이 막 등장할 무렵이었으니,이들의 사업적 감각이 어느 정도 빨랐던 지를 짐작할수 있는 대목이다. MP3 플레이어 제조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PC통신에 정보를 제공하는 IP사업을 먼저 하기로 했다.

MP3 음악다운로드 IP 사업이었다. 당시는 MP3 파일이 막 등장한 초창기 상황이었다. 하지만 박 사장은 초보 CEO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저작권료에 지레 겁먹고,스스로 포기한 것.

이들은 PC통신에 하드웨어정보를 제공하는 IP사업을 먼저 오픈했다. 나중에 MP3가 뜨고, 업체들이 공짜로 제공하는 것을 보고,사업이란게 일단 벌려놓고,나중에 수습을 해도 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97년,박지영에게 결단의 순간이 찾아왔다. 같이 시작했던 동기 2명이 군문제 해결을 위해 병역특례자로 다른 회사에 입사한 것. 졸지에 혼자 남았다.심각한 고민의 연속.

사업을 접고,입사를 택해야하는 상황이었기 때문. 하지만 박지영은 오기가 발동했다. “무지 아쉽고,뭔가 다른 걸 해보고 싶더라구요” 박지영은 결국 혼자 남아 새로운 출발을 다짐했다.

◆ 끝없는 좌절,그리고 빚더미

천리안,하이텔 등 모든 PC통신을 한꺼번에 검색할 수 있는 통합 검색엔진을 개발했다. 이용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을 것으로 확신했다. 하지만 결과는 보기좋게 빗나갔다.

PC통신회사 모두 반대하고 나선 것.자사 PC통신에서 어떻게 경쟁사 정보까지 검색해줄 수 있느냐는 것. 사업이란게 결코 만만치 않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동안 벌었던 것을 다 털어넣고,빚까지 내 개발했건만,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98년 이후 웹이 보편화하면서 유료정보를 제공하는 컨텐츠 IP사업은 풍전등화의 상황으로 내몰렸다. 박지영은 이때부터 파격적인 생각들을 하기 시작한다. 실제 시간이 지날수록 하고싶은 일과 하고 있는 일 사이에 정말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98년,박지영은 하드웨어제조에 뛰어들었다. 또다시 시작한 사업아이템은 DDR컨트롤러. 무려 2억원 가까운 돈을 들여 제품을 개발했다. 하지만 외주업체인 오프라인 공장을 운영하는 업체를 상대하면서 박지영은 또다시 좌절을 맛본다.

발바닥이 닳도록 뛰어다녔지만,DDR컨트롤러 사업마저 포기해야 했다. 공장생리를 너무 몰랐던 탓이 컸다. 1억6천만원상당의 빚만 덩그라니 남았다.최악의 상황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빚더미에 올라앉고 부턴 거의 패닉상태였다. 모든 것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사장으로서 역량이 부족한 것아니냐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98년과 99년초는 박지영이 지금껏 살아오며 가장 쓰라린 패배의 경험을 맛본 시간이었다. 20대후반의 나이에 2억원 가까운 빚더미에 앉으며 처절하게 실패한 현실은 그에게 정신적으로 견디기 힘든 깊은 상처였다.

◆ 우연히 찾아든 기회

“박 사장,이젠 무선인터넷이 뜰거 같애.모바일을 통해 제공하는 게임을 만들면 어떨까? 괜찮을 것같은데…”

99년초,병역특례로 인포뱅크에서 근무하던 이영일이사가 던진 한마디에 박지영은 귀가 번쩍뜨였다. 그가 무릎을 친 것은 나름의 경험 때문이다.

IP사업을 2년 넘게 해온 박지영은 텍스트로 된 정보에는 이용자들이 절대 돈을 쓰지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다. PC통신 IP중 유일하게 돈을 버는 것 역시 증권정보와 게임 두가지라는 사실을 떠올리곤,박지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람들은 게임처럼 자기가 좋아서 미친듯이 하는 경우와 증권투자처럼 자신의 돈과 관련한 두가지 쪽에는 돈을 씁니다.이 두가지가 아니면 절대 돈을 안쓰죠”

더더욱 휴대폰 게임이라는 컨셉 자체가 당시 최초라는 것도 박사장의 가슴을 뛰게한 요인이었다.

“가장 먼저 시작하면 제일 잘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처절한 상처를 입고 있던 박지영은 또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 재기에 나섰다.

그는 99년초,밤낮없이 개발에 매달렸다. 당시 모바일게임은 아이디어만 있는 백지상태의 수준. 어느 누구도 휴대폰으로 게임을 서비스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실제 게임개발업체조차 불가능하다고 했고,과금조차 안되는 상황에서 공짜로 게임컨텐츠를 휴대폰서비스업체에 준다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라고 단정하는 분위기였다.

휴대폰서비스 업체 또한 “그게 가능할까”라며 고개를 가우뚱거리는 상황이었다. 99년 초여름, 박 사장은 퀴즈게임과 오목,다마고찌,심리테스트 등을 개발,LG텔레콤에 들고 갔다.

사업제안을 했을 당시 반신반의하던 LG텔레콤 직원은 컴투스가 개발한 모바일게임을 보고,크게 놀라는 눈치였다. 99년 8월,컴투스의 모바일게임은 그렇게 LG텔레콤을 통해 세상에 첫 선을 보이게 된다. 물론 공짜였다.

계속 만들어 LG텔레콤에 제공했다. 당장 과금도 안되고,공짜지만 언젠가는 유료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지칠대로 지친 박 사장에게 희소식이 찾아왔다.

2000년초 병역특례로 회사를 나갔던 이영일 이사 등 2명이 다시 합류한 것.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개발에만 매달리며 휴대폰서비스업체에는 무려 1년 6개월간 공짜로 제공했다.

◆ 인연,그리고 마지막 승부수

컴투스의 오늘은 인포뱅크란 회사와 참으로 인연이 깊다. 수없이 시행착오를 겪었던 컴투스가 모바일게임이란 사업아이템을 찾게된 게 바로 인포뱅크 때문.

이영일이사가 무선솔루션업체인 인포뱅크사에서 병특근무를 하며 아이디어를 얻은 것. 실제 인포뱅크 박태형 사장이 박지영 사장에게 모바일게임을 해보라고 적극 권유했다.

박 사장은 고민끝에 모바일게임을 마지막 사업아이템으로 정했다. 모바일게임조차 실패하면 미련없이 사업에서 손을 떼기로 작심했다.

“당시는 정말 배수진을 친 상태였습니다.실패하면 더이상 사업에 소질이 없으니 스스로 문닫자고 결심했죠”

그랬다.모바일게임은 보통 알려진대로 박 사장이 국내 최초로 뛰어들어 운좋게 성공한 아이템이 아니었다. 게임은 수없는 실패끝에 지푸랑이라도 잡을 심정으로 택한 ‘최후의 보루’였다.

인포뱅크와의 인연은 투자로까지 이어졌다. 병특근무를 하던 이영일씨가 퇴사 의사를 밝히자 인포뱅크 박태형 사장이 투자까지 해준 것. 2억원을 투자받았다. 개발실적도 없는데,사람과 아이디어만 보고 선뜻 투자를 해줬으니, 그야말로 가뭄의 단비가 아닐수 없었다.

박 사장은 그래서 지금도 인포뱅크를 사업적 은인이라 생각한다. 스스로 배수진을 치며 벼랑끝에 몰린 탓일까? 도저히 해결방안이 없을 것 같던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4년여간 꽉 막혀있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 것.

2000년 5월,놀랍게도 투자유치에 성공했다. KTB네트워크를 비롯,3개 창투사로부터 무려 40억원의 투자를 유치한 것. 천신만고끝에 찾아든 행운에 박 사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동안 흘린 눈물과 설움이 복받혀서인지,박 사장은 그날 밤새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컴투스는 벤처열풍속 ‘묻지마’투자의 막차를 탄 케이스였다.

“당시 참 운이 좋았던 것같습니다. 그때 벤처붐이 일지 않았다면 컴투스는 현재 존재하지 않았을 겁니다” 박 사장의 겸손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투자유치는 이미 예견된 수순이었다.

LG텔레콤에 이어 KTF가 99년 12월,SK텔레콤은 2000년 2월부터 각각 모바일게임을 제공하고 있었고,특히 SK텔레콤 011 이용자들로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의 모바일용 롤플레잉게임(RPG)인 ‘춘추열국지’가 엄청난 인기를 끌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것.유료화는 대세이고,과금만 시작하면 엄청난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며 투자했던 창투사의 판단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컴투스의 매출은 그해 10월 SK텔레콤이 모바일게임 과금을 개시하면서 시작된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컴투스의 폰고도리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오목 등 초기 게임 대부분 대박행열의 효자품목으로 떠올랐다. 당장 월 수천만원의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컴투스의 성공신화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박 사장은 투자유치를 끝내고 유료화를 시작할 때부터 그야말로 행복한 나날의 연속이었다고 술회한다. 발뻗고 자기 시작했단다.

그해 10월부터 수익이 나기 시작했다. 당시 컴투스의 행보에 대해 휴대폰서비스업체들도 믿기 어렵다는 눈치였다. 모바일게임 하나가 만들어내는 매출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 컴투스는 그 때부터 서서히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었다.

박지영, 그는 누구인가
74년 경남 밀양생.고려대 컴퓨터학과 졸업.대학 재학시절 창업에 나선 대학생CEO출신. 특유의 적극적인 성격과 뛰어난 대인관계가 강점. 여성특유의 섬세함 못지않게 강한 추진력의 소유자.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친화력이 뛰어나다는게 주위의 평.
취 미게임
운동골프(최근 주위 권유로 시작했다)
존경하는 CEO모든 사람이 다 스승이다.현재 CEO를 하고있는 사람은 모두 존경할만한 점을 갖고있는 사람들이다.
친한 IT맨정영희 소프트맥스 사장,정진영 아이코 사장,한용규 지어소프트 사장
10년후 모습전문경영인으로서 인정받은후 새로운 것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컴투스, 어떤 회사인가
설립일1996년 8월
종업원74명(2003년 8월기준)
자본금30억원
연락처(02)6292-6000. www.com2us.com
사업영역모바일게임,애플리케이션 개발(e북,멜로디마니아,시사엘리트사전)
경영계획세계 최대 모바일게임업체로 등극.
매출목표2003년 120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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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투스 회사 소개서

◆ 박지영의 무서운 질주

박지영 사장은 요즘 한껏 어깨가 올라가 있다. 노키아,삼성전자 등 기라성같은 회사들이 새 휴대폰단말기를 출시,모바일게임을 데모할 때마다 늘 컴투스 볼링게임을 사용하기 때문.

실제 컴투스의 볼링게임은 세계표준으로 통할 정도로 단연 독보적이다. 컴투스가 빠른 속도로 자리잡은 것은 사업초기 겪었던 4년여간의 쓰라린 경험이 결정적인 밑거름이 됐다.

박지영의 고난기는 기술과 마케팅,경영에 완전초보였던 그가 필수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던 과정이었다. 오랜 고통에 굴하지 않고 열정을 불태운 박지영의 오기는 결국 성공신화로 이어지고 있다.

자바플랫폼형 제품은 박지영의 사업적 감각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 박 사장은 기존 왑(WAP)방식 모바일게임의 단점을 눈여겨본후 곧바로 자바제품 개발을 결행했다.

기존 방식의 경우 이용자 입장에선 계속 통화를 해야하기 때문에 통화요금이 많이 나오고,사업자들 역시 더많은 고객을 유치하지 못하는 요인이었다. 반면 자바플랫폼의 경우 게임을 다운로드할 때만 통화료가 부과되는 개념.다운로드후 게임이용시는 전혀 과금이 안되는 것.

이용자도 사업자도 모두 대만족이었다.휴대폰위에서 구동하는 자바환경 모바일게임 역시 2000년 10월, 이렇게 컴투스에 의해 국내 최초로 만들어졌다. 박지영의 무서운 질주는 최근 그 속도를 더하고 있다.그는 최근 해외시장에 또한번 승부수를 던졌다.

단순 게임수출이 아니라,모바일업체와 수익을 나누는 로열티개념의 수출이다. 사실 세계적 메이저업체와 수익분배(Profit Sharing)개념의 딜을 성사시킨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려운 일임은 주지의 사실.

이는 컴투스 게임의 경쟁력이 글로벌시장에서 통할수 있는 수준임을 메이저사들이 인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2001년 8월,컴투스는 일본에 진출했다. 지난해 8월에는 일본내 선두권 모바일업체인 KDD 자바포털중 모바일게임분야에서 1위를 기록,일본을 놀라게 한 바있다.

컴투스가 유럽내 최대 휴대폰서비스회사인 보다폰에 게임을 공급할수 있었던 것도 일본시장에서 1등을 했다는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일단 제품을 제공하겠습니다.보시고 판단을 해주십시오”

2002년초,이미 영국에서 상주를 하고있던 해외마케팅팀장은 다짜고짜 보다폰본사를 방문,담당자를 붙잡고 통사정을 했다.

보다폰사는 컴투스의 경우 도중에 망할 수도 있다는 점을 들어 난색을 표명했다. 2002년 10월,혼신을 다해 12개게임을 5개 언어,7개 단말기기종에 사용할수 있도록 개발,납품했다.

이후 보다폰 서비스 모바일게임 톱10에 컴투스 제품이 3개나 올라가는 성과가 나오자 보다폰사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일본 게임이 최고라 생각했던 터라 믿기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중국진출도 눈부시다.중국현지에 합작회사를 설립,이미 차이나모바일에 공급하는 등 중국시장 개척에 한창이다. 이에 힙입어 컴투스는 최근 14개국에 자사 게임을 선보이며,해외서만 월 2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 박지영의 꿈

박지영 사장은 요즘 생각이 많다. 자금유치와 지난해부터 흑자기조로 접어들면서 결실들이 풍성하지만,걱정이 가시지 않는다. 특히 글로벌비즈니스를 시작하면서 밤잠을 설칠때가 잦다.

그가 요즘 던지는 키워드는 세계 최고의 모바일게임회사가 되는 것과 컴투스를 세계 최고의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야무진 그림이다. 고민의 핵심은 어떻게 글로벌기업으로 키우냐는 것.

“이젠 정말 국제수준에 맞는 고객만족도와 제품완성도를 보여줘야 합니다.공급체계,개발인력도 마찬가지죠”

그는 요즘 마음이 바쁘다.그동안 ‘회사 = 박지영’하던 등식을 깨기 위해 그는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다.

“외부 투자를 받고난 이후 회사의 개념이 틀려지기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이젠 나와 회사를 명확하게 구분해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박 사장의 또다른 관심은 회사가 시스템을 통해 모양을 갖추는 일.

2000년부터 회사가 가는 방향과 맞지 않는 사람을 내보내고,새로운 사람을 채우는 일련의 과정은 고통 그 자체였다. 회사의 틀을 갖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내보내야 할 때가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한다.

진정한 CEO의 역할에 대해 고민을 하며,이젠 중장기 회사의 비전과 새로운 사업포트폴리오 등을 고민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특히 로컬사업에서 글로벌비즈니스로 무게중심을 서서히 옮기면서 두려움이 더 많다고 설명한다.

“일본 서비스 준비 때 정말 두려웠습니다. 일본 게이머들이 좋아할까?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을까? 재미있어 할까? 정말 걱정했죠. 근데 도전하니 되더라구요”

박지영의 성공론을 들어보자. 그가 던지는 첫번째 성공조건은 ‘아이디어’. “아이디어가 정말 중요합니다. 누구나 아이디어를 생각하죠. 문제는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게 중요합니다”

두번째 핵심 키워드는 도전정신과 학습자세. “급박하게 돌아가는 시장상황에 탄력적으로 대응할수 있으려면 항상 도전하고 학습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늘 힘든 것에 도전하고,뭐든 배울 자세가 돼있어야 한단다.겸손과 팀웍도 그가 강조하는 또다른 성공조건이다.

기업으로서의 성공은 직원,조직문화,비전,시스템 등 경영전반에 대한 이해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단정한다.

컴투스 박지영 사장.그는 국내 모바일게임시장의 지존에서 이제는 글로벌시장의 선두기업을 꿈꾸며 힘차게 진군하고 있는 글로벌 CEO로 거듭나고 있었다.

[인터뷰를 마치며]

박지영 사장은 게임회사 사장에 걸맞게 게임을 무지 좋아한다고 합니다. 리니지2,에버캐스트 등 신작 게임들에 심취해있다고 하네요. 주말엔 게임과 7년쯤된 강아지와 지내는게 유일한 낙이라고 합니다.

/김광일 객원칼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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