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9시 시베리아 시골 도시 벨로고로스크 자동차정비소가 문을 열면 어제 문제가 생긴 L실장 차를 고쳐야 한다. 오늘은 자동차 수리 때문에 늦게 출발할 수밖에 없다. 손님이 적은 시골 여관이라 아침 식사를 제공 안 한다. 아침 식사를 파는 식당도 없다.
부득이 난생처음 컵라면으로 아침을 먹고 미세스 송과 함께 시내 공원에 산책을 갔다. 1991년 소련연방의 해체 후 레닌 동상은 대부분 철거되었는데, 이곳은 시골 도시라 하나 남아있다고 한다. 요즈음 러시아 전체에 남아있는 레닌 동상이 희귀해서 사진 찍는 관광 장소라고 한다. 아침 날씨가 13도로 선선해서 두꺼운 패딩을 꺼내 입는다. 한국의 초가을 날씨처럼 선선하다.
노상에서 동네 주민들이 시베리아 산딸기, 야생 베리(wild berry)를 팔고 있다. 시식해 보라고 권해서 먹어보니 모양새는 맛있어 보였는데 신맛과 약간 씁쓸한 맛이다. 봄철 일조량이 적어서 한국보다 과일의 당도가 낮다, 어제 산 야생 꿀도 확실히 당분이 적은 것을 느낀다. 언제 시베리아에 다시 오겠는가 생각이 들어서 두 종류의 야생 베리를 노점상에서 샀다. 한 컵 가격이 250루불(약 4000원)이다. 짧은 여름 한번 먹을 수 있는 무공해 자연식품이라서 미세스 송에게 권하니 배탈 난다고 야생 베리를 안 먹는다.
옆에서 장사하는 할머니가 사진 찍어 달라고 해서 한 장 찍어주니 좋아한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아침 식사를 컵라면으로 제공한 것에 대해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서로 언성이 높이고, 감정 섞인 말이 오간다. 아침 식사로 컵라면을 싫어하는 일행이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미세스 송이 중간에서 화해를 주선해서 임시로 가라앉는다. 음식 습관이 다른 어른들 간에 발생하는 불가피한 갈등이다.
아침 정비소가 9시 문을 열자마자 어제 고장 난 터보 수리를 위해 들렀다. 정비소 기술자는 한국 차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더 큰 도시 정비소에 가라고 한다. 계기판에는 빨간 불빛이 계속 반짝거려서 불안감 속에서 이동한다.
'스보보드니'는 벨로고로스크에서 60킬로 떨어져 있다. 러시아어 '스보보드니'는 한국말로 '자유'라는 의미이다. 이 도시는 독립군부대가 참변을 당한 '자유시 참변'으로 잘 알려져 있다. 봉오동 전투가 1920년 5월, 청산리 전투가 1920년 10월에 있었다. 일본군 추격에 쫓기던 독립군 군대는 추운 겨울 두만강 건너 길림성 백두산 자락에서 출발하여 북만주벌판, 흑룡강, 싱안령 산맥을 넘어 수천 킬로가 넘는 먼 길을 걸어서 '스보보드니'(자유시)에 1921년 봄 도착했다.
혹독한 만주의 겨울 추위에 빈약한 복장과 부족한 식사를 하면서 얼마나 고생했겠는가? 어렵게 이곳에 도착 후 1921년 6월에 러시아 적군과 고려공산당 군대에 의해 독립군이 학살당한 도시이다. 독립군 측 기록에 의하면 600여 명 사망, 900여 명 체포이다. 학살로 대한독립군 부대는 거의 소멸하여 1921년 이후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투는 없다.
김좌진 장군은 학살의 낌새를 눈치채고 사전에 빠져나와 참변을 면했다고 한다. 러시아의 변방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분들은 대부분 무명용사일 것이다. 그 후손들이 독립유공자 혜택을 받지도 못했을 것이다. '자유'라는 뜻의 ‘스보보드니’는 스탈린 치하 정치범 수용소로 유명하다. 최대 19만 명이 수용되었다고 한다. 스탈린 자신도 러시아혁명 이전 반체제범으로 체포되어 어느 시베리아 수용소에 2년 동안 수감 경력이 있다. 억압받았던 자가 억압하는 위치에 있게 되면 더욱 잔인해 지는 일이 인간사와 역사에 많다.
자동차정비소에서 시간을 많이 소비하고 늦게 '스코보노디노'로 출발한다. 북위 54도에 위치한 인구 1만 명의 작은 도시이다. 오늘 이동 거리는 550킬로이다. 우리 여정의 시베리아 초원길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3일간 2000여 킬로를 시베리아 숲길을 지나오면서 원시적인 자연계에 익숙해지고 있다. 시베리아 산림은 비슷하다. 자작나무 숲이 주종이고, 때로는 소나무 숲 군락지도 나타난다. 열대 지방, 온대지방 등에 비해서 나무 수종이 매우 단순하다. 텅 빈 대초원도 번갈아 나타난다. 연초록색 물결이 출렁이는 초원의 바다이다.
농사를 짓고 싶어도 근처에 시장이나 판로가 없기 때문에 경작도 어려울 것이다. 도로변의 많은 초지가 텅 빈 채로 있다. 여름철 낮이 16시간으로 매우 길고, 강한 햇볕 때문에 짧은 여름 3개월 동안에 감자, 밀, 채소 등 경작이 가능하다고 한다. 공기는 매우 맑고,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고, 무공해 자연은 아름답다. 거의 경치의 변화가 없는 시베리아 대평원 길을 몇 일째 달리고 있다.
가끔 마을이 나타나는데, 사람이 안 사는 폐가가 많이 보인다. 젊은 자식은 모두 모스크바 등 대도시로 떠나고, 시베리아에 살던 부모가 죽으면 우리 농촌처럼 자연스럽게 폐가가 될 것이다.
자작나무, 소나무가 서로 경쟁을 하면서 군집을 이루고 있다. 어떤 곳은 자작나무가 주종이고, 어떤 곳은 소나무가 주종이다. 대체로 숲속의 나무는 매우 빽빽하게 밀집해서 자라고 있다. 아마도 겨울 강풍과 추위에 서로를 지탱하기 위함이다. 가혹한 겨울 날씨에 식물의 살아남기 위한 지혜이다.
변화가 없는 삶은 어떨지 생각해 본다. 이러한 환경이 사람을 대륙성 기질, 만만디 기질을 만드는 것이 아닐지 생각한다. 단순함을 즐겨야 하는 여행이다. 자연의 외부 관찰자가 아니고, 자연의 내부에 들어가서 자연의 일부로 순응해야 한다. 겨울철 순백의 백설이 쌓인 경치를 생각해 본다. 겨울은 통행량도 매우 적은 적막강산이리라. 길은 포트 홀이 매우 많고, 바운딩도 심해서 매우 조심해서 운전하고 있다. 미세스 송은 벌써부터 허리가 아프다고 서울에서 가져온 허리 보호 복대를 꽁꽁 동여매고 있다. 길이 나빠서 자동차가 매우 흔들리기 때문이다.
나는 멋모르고 초원에 사진을 찍으러 잠시 들어갔다가 초원에 사는 야생 벌레들에 집중 공격을 받았다. 처음은 모기한테 물린 줄 알았는데, 나중에 초원의 야생 곤충에 물린 것을 알게 되었다. 곤충의 독성이 매우 강해서 1주일 이상 붓고 가려워서 고생을 크게 했다. 시베리아 곤충의 독성에 면역력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 가져간 모기 물린 약은 전혀 안 듣는다. 밖에서 보면 아름다운 초원인데 속은 무서운 곤충들의 천국이다. 다시는 초원에 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면역력이 생긴 이곳의 농민이나 목동은 아마 괜찮을 것이리라.
제때 식사를 못 먹고, 장시간 차에 앉아 있고, 음식은 기름기가 많고, 맛은 매우 짜다. 벌써 소화불량이 심하고, 설사를 자주 한다. 식사 후에 정로환과 소화제를 챙겨 먹고 있다. 아플 것 대비해서 소화제, 항생제, 감기약, 배탈약, 벌레 물린 약 그리고 허리 보호 복대 등 많은 약품을 준비해 왔는데 어려운 상황이 일찍 시작하니 약이 모자랄까 걱정이다.
미세스 송은 평소 퇴행성 허리통증으로 고생하는데, 허리 보호 복대로 잘 견뎌야 한다. 뒷좌석의 바운딩으로 인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앞좌석에 앉도록 해야겠다.
◇윤영선 법무법인 광장 고문은 서울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 석사, 가천대학교 회계세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국세청, 재무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제24대 관세청장,삼정kpmg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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