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강지용 기자] 쌍용그룹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김석원 전 회장이 26일 별세했다. 향년 78세. 재계와 성곡언론문화재단에 따르면 김석원 전 회장은 이날 새벽 3시께 노환으로 별세했다.
쌍용그룹을 한때 재계 6위 규모로 키웠으나 자동차 사업 투자 실패로 그룹 해체의 비운을 겪었다. 그는 쌍용그룹 창업주인 김성곤 전 회장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1945년 대구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는 서울(서울고)에서, 대학은 미국(브랜다이스대 경제학과)서 나왔다.
고인은 부친인 성곡(省谷)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가 별세하면서 1975년 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30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회사를 이끌게 된 고인은 세간의 우려와 달리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사세를 키웠다.
방직업과 시멘트업을 하던 쌍용그룹은 김 전 회장의 지휘하에 정유, 중화학, 금융업 등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했다. 빠른 사업 성장과 과감한 인수 합병에 힘입어 쌍용그룹은 쌍용자동차, 쌍용중공업, 쌍용건설, 쌍용정유, 쌍용화재, 쌍용양회, 쌍용투자증권 등을 거느린 재계 6위 규모의 재벌로 성장했다. 이 같은 성과에 당시 고인은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 삼미그룹 김현철 회장 등 다른 젊은 후계자들과 묶여 '재계의 3김'으로 불리면서 주목받았다.
10여년간 성장세를 이어가던 쌍용그룹은 그러나 자동차 산업으로 사업을 확장하면서 어려움을 겪게 됐다. '자동차 애호가'였던 고인은 1986년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던 동아자동차 인수전에서 시세보다 높은 가격을 제시, 삼성을 제치고 경영권을 확보했다.
이 일로 1조원에 가까운 부채를 더 안게 된 쌍용자동차는 코란도, 무쏘, 체어맨, 렉스턴 등을 출시하면서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과 고급 승용차 브랜드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사업 자체는 적자가 계속됐으며 그룹 내에서는 자동차 사업을 접어야 한다는 말도 나왔으나 고인은 사업을 계속했다. 이런 가운데 고인은 1996년 정계에 진출했고, 그룹 상황은 더 어려워졌다.
매각설 등이 나오던 쌍용차는 1997년 12월 IMF 구제금융 사태가 발생한 지 일주일 만에 대우자동차로 매각하기로 결정됐으며 쌍용그룹도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후보로 당선돼 정계에 진출했던 김 전 회장은 그룹이 경영 위기에 빠지자 1998년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경영에 복귀했으나 결국 그룹의 해체 수순을 지켜봐야 했다.
쌍용그룹은 1998년 채권단에 의해 구조조정에 들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고인의 경영권도 박탈됐다. 이어 쌍용그룹은 2000년에 쌍용양회의 대주주에서 2대 주주가 되면서 사실상 해체됐다.
그는 1988년 서울올림픽 직후 개최된 세계청소년캠프 본부장을 맡아 청소년 국제교류에 기여하고, 2000년부터 2년간 세계스카우트지원재단 의장직을 맡아 한국스카우트의 위상을 높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유가족에는 부인 박문순씨, 아들 김지용(학교법인 국민학원 이사장)·김지명(JJ푸드 시스템 대표)·김지태(태아산업㈜ 부사장)씨가 있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른다. 빈소는 연세대 세브란스 병원 특1호실. 발인은 29일 오전 7시 20분. 장지는 강원도 용평 선영이다.
/강지용 기자(jyk80@inews24.com)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