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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장명식 FST 사장


 

안녕하세요,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코너입니다. 여성 기업가 한국토프톤 염정순 부회장의 글로벌비즈니스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염 부회장의 창업기는 무릇 사업가란 숱한 시련과 시행착오를 통해 경영노하우를 쌓아가고,화려한 성공기반 역시 끝없이 이어지는 어려움과 고통스런 난관들을 정면으로 부딪혀 해결함으로써 얻어진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듯합니다.

염 부회장이 추천한 99번째 릴레이인터뷰의 주인공은 ㈜에프에스티(FST) 장명식 사장입니다. 염 부회장은 장 사장에 대해 “1세대 벤처창업가중 아직까지 현업을 지키며 탄탄하게 회사를 키우고 있는 몇안되는 기업가”라며 “오랜 다국적기업 근무경험을 바탕으로 글로벌마인드를 갖고 있는 경영자”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서강대 동문으로,염정순 부회장이 2년 선배라고 합니다.50대 초중반의 적지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20년가까이 현장에서 열정적으로 사업을 이끌고 있는 두 CEO의 행보가 조루현상을 보이고 있는 국내 벤처산업계에 신선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는 듯 합니다.

벤처 1세대 CEO중 한명인 FST 장명식(52) 사장의 18년간 이어진 벤처창업기를 소개합니다.


반도체,LCD공정에 사용되는 포토마스크용 보호막인 펠리클,온도조절장치인 칠러 등은 대표적 반도체 소모품으로 불리는 아이템.하지만 최첨단 기술력을 요한다.

FST 장명식 사장은 벤처 CEO 1세대로 꼽히는 인물.경기 기흥공장 본사에서 만났다.공장 맞은편 직선거리로 5km쯤 떨어져 있는 기흥 삼성반도체공장이 한눈에 들어온다.

장 사장은 매우 호방하고 스케일큰 CEO로 통한다.창업한지 18년째를 맞는 베테랑 CEO답게 여유롭고 노련하기 그지없다.시장을 바라보는 식견과 비즈니스에 대한 해박한 경영노하우는 원숙한 경영자 모습 그대로다.

화법은 숨김없이 쏟아내는 직설법이다.간간이 파안대소하며 웃어제치는 모습에는 자신감이 넘친다.거침없는 비판도 서슴지 않는다.오랜 세월 오퍼상과 다국적기업 지사장을 거친 탓인지,뛰어난 글로벌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87년 설립된 화인반도체가 전신인 FST는 반도체장비 및 종합부품업체로 펠리클(포토마스크용 보호막), 칠러(온도조절장치), IPA 드라이어(반도체 세정장비) 등을 주력사업으로 하고 있는 벤처기업.

주로 경쟁사는 미,일의 세계적 반도체장비회사로,450억원대의 매출을 자랑하는 기술중심의 알짜 벤처기업이다.

◆ 100명의 외판원을 거느린 대학생 사장

장명식 사장은 87년 창업에 나선 1세대 벤처 CEO다. 미래산업 정문술 사장,메디슨 이민화 회장 등 여느 1세대 벤처 CEO와는 달리,창업한지 18년이 지났지만,아직도 현직을 지키고 있다.

장명식이 사업가의 길로 들어선 계기는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그는 대학졸업과 동시에 사업가로 나서겠다고 결심할만큼,깨어있는 젊은이였다.

실제 그는 대학시절 사업가적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학사장교(ROTC)지원생이었던 장명식은 대학 3년시절,건강 때문에 학사장교를 중도포기,휴학을 한다.

하지만 1년 6개월이라는 휴학기간은 장명식에게 ‘사업’이 뭔지를 일깨워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휴학기간중 그가 벌인 일은 이른바 책 외판원사업.

외판원을 고용,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비롯,각종 인물시리즈 등 수십권짜리 전집을 할부로 판매하는 사업이었다.당시 사회적 풍토는 책장에 비싼 전집을 꽂아놓는 게 비싼 책장가구를 구입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놀라운 것은 그가 벌인 사업규모.대학생 신분이라고 믿기 어려울만큼 방대했다.그는 친구,선후배 대학생을 조직화해 세일즈에 나섰다.틈만나면 동문회나 서클,각종 동호회에 얼굴을 내밀며 외판원을 영입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운영한 대학생 외판원규모는 무려 100여명.돈벌이는 월매출 1천만원에 한달 순익이 평균 150만원에 이를정도였다.순익 150만원은 당시 대학교 등록금이 5만원이던 점을 감안하면,실로 엄청난 규모였다.

출판사를 제외하곤 장안에서 몇 손가락안에 들정도로 큰 판매상이었다.20대 초반의 나이에 100여명의 외판원을 관리하고,순익을 내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물리학도로서 계속 공부를 하지않을 바에야 사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사업하면 돈도 벌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1년 6개월만에 복학했다.상아탑에 돌아왔지만,장명식은 이미 비즈니스를 꿈꾸는 예비창업가로 변모해 있었다.물리학과 출신들이 갈만한 회사들이 대부분 변변하지 못했던 당시 상황도 그가 사업을 꿈꾼 또다른 요인이었다.

◆ 장명식이 오퍼상을 택한 이유

대학졸업후 그는 자그만 오퍼상을 첫직장으로 골랐다.78년 당시만해도,지금과는 달리 대학 졸업생들은 직장을 골라서 갈만큼 ‘구인난’이 심했다.굴지의 대기업들이 각 대학캠퍼스를 돌며 우수학생을 채용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때였다.

“당시 생각은 계속 (박사과정)공부하지 않으면,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확고했습니다.왜냐하면 물리학도들이 갈수있는 회사라는게 뻔했기 때문이죠”

장명식은 이미 창업을 염두에 두고 첫 직장을 구할만큼 ‘될성부른 잎’이었다. 78년,입사한 삼미상사는 케미컬원료를 수입,판매하는 자그만 무역회사.

지원만하면 입사가 가능한 굴지의 대기업이나 종합상사를 제쳐두고 오퍼상을 택한 이유는 간단했다.사업하기 가장 쉬운게 오퍼업이라는 나름의 판단때문.

“돈없이 할수 있는게 없나 곰곰히 생각해봤더니,수입업이더라구요.가장 빠르게 사업을 할 수 있는 분야라 판단,배우기 위해 지원했죠”

여느 대학친구들과는 달리 장명식은 이미 20대후반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준비하는 젊은이였다.입사후 계측,측정장비를 수입판매하는 일을 새롭게 개척했다.

미국 장비를 들여와 국내 연구소 등에 팔았다.3년동안 정신없이 뛰어다녔다.81년쯤,제대로 해볼요량으로 국내 최대 측정장비수입업체인 신한과학으로 옮겼다.장명식은 어느덧 오퍼비즈니스의 매커니즘과 영업노하우를 착실하게 터득해가고 있었다.

“앞으로 반도체가 확실하게 뜹니다.같이 반도체제조 장비사업을 해봅시다” 장명식은 2년후인 83년,또한번 변신에 나선다.

당시 반도체는 재계의 핫이슈였다.반도체가 뜰 것이란 전망이 잇따랐다.삼성은 이미 시작했고,현대그룹이 시장조사를 시작할 무렵이었다.서울일렉트론 창업자 서모 사장이 손을 내밀었다.

장명식은 과감히 창업대열에 합류했다.서울일렉트론에서 그가 한 일은 미국산 반도체제조장비를 수입,판매하는 것. CAD,CAM도 취급했다.서울일렉트론은 반도체산업의 붐과 맞물려 폭발적인 성장세를 구가하기 시작했다.

오퍼상임에 불구하고 직원이 무려 100여명,매출규모도 연 8천만달러(한화기준 800억원)규모에 이를 정도였다.장명식은 미 램리서치사의 드라이에처란 장비수입판매 업무를 맡았다.

승승장구했다.삼성 현대 LG 등 반도체회사를 휩쓸고 다녔다. 그렇게 9년간 오퍼업에 매달려온 장명식.이미 창업을 위해 오퍼상을 택했던 그는 스스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87년,장명식은 가슴에 품은 꿈을 펼치기 시작한다.

◆ “펠리클과 칠러를 아세요”,투잡스에의 도전

이미 덩치가 커진 회사내에서 장명식은 서서히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거창하게 창업대열에 합류했지만,시간이 흐를수록 창업멤버간 생각들이 달라졌기 때문.

87년,장명식은 홀로서기를 결행한다.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놀라운 것은 사업아이템을 찾아내는 감각.수년간 반도체장비시장을 들여다본 장명식은 ‘펠리클’이란 독특한 사업아이템을 찾아낸다.

펠리클이란 반도체 웨이퍼 마스크위 표면을 대기중 분자나 다른 오염원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박막.곧바로 화인반도체기술㈜을 설립,제조업에 뛰어들었다.

장명식은 펠리클의 경우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만이 생산할수 있어,미국내에서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간파,사업아이템으로 정했다. 반도체공정에 꼭필요한 초정밀 소모품이었다.

자본금은 2억원 남짓.사업초기부터 KTB가 50%,.미국 파트너사가 25%,장 사장이 25%씩 투자해 설립했다.이미 오랜 반도체장비 오퍼업을 해온 장명식을 가능성을 높이사,투자해준 것.

수원시내 상가건물에 클린룸을 지어 개발에 들어갔다.국내 최초로 펠리클양산에 들어갔다.전 세계 펠리클시장은 미국계 2개사,일본계 3개사 그리고 한국의 FST 등 총 6개사가 접전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장명식은 창업한 첫해부터 두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투잡스’족이었다.램리서치쪽에서 계속 지사장을 맡아줄 것을 간곡하게 요청했기 때문.

“반도체는 신공정,장비사이클에 대한 정보가 매우 중요합니다.최신 기술습득을 위해 외국 기업과 채널을 구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양쪽 일을 다 할 수밖에 없었죠”

그랬다.그는 화인반도체를 위해서도 기존 오퍼사업을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이미 램리서치본사 부사장을 역임할 정도로 장명식은 램리서치내에서 비중있는 인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램리서치 드라이에처장비를 국내 처음 들여와 판로를 개척해준 사람이 바로 장명식이었기 때문.하지만 사업초기 두가지 일을 병행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91년,화인반도체에 전력투구하기 위해 램리서치 일을 그만뒀다.하지만 램리서치와 인연은 2년후 다시 오뚜기처럼 복원된다. 램리서치 본사는 93년,장명식에게 또다시 SOS를 쳤다.

“램리서치사가 한국에 제조공장을 설립,직접 진출하겠다며 무조건 맡아달라는 겁니다. 외국계 드라이에처장비회사가 국내에 진출한 1호기업이었죠”

어쩔수 없이 또다시 램리서치코리아 사장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당시 4천만달러를 투자,천안에 공장을 설립하는 일부터 진두지휘했다.

당시 램리서치사는 일본기업과 경쟁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램리서치사의 입장에서는 세계 반도체시장의 중심지역으로 떠오르는 한국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직접진출’은 불가피했다.

“반도체산업은 공정개선의 과정을 통해 발전합니다.신기술과 새로운 장비를 적용해야하는데,본사가 미국에 있어서는 기술지원이 제대로 될수가 없습니다.새장비를 납품할 경우,늘 문제가 발생합니다.고객사 생산라인에 살아야합니다”

장명식은 83년부터 에이전트를 맡아온 램리서치와의 인연을 뿌리칠수 없었다.램리서치본사입장에서는 장명식외엔 한국내 공장설립,그리고 양산,납품에 이르기까지의 복잡다단한 일들을 맡길 사람이 없었다.

램리서치 입장에선 장명식외 대안이 없었던 것.실제 한국시장은 램리서치매출의 20%를 차지할만큼 중요하고,그 중심에 장명식이 있었기 때문.역동적으로 일했다.

외국계 다국적기업이 현지지사 직원의 ‘투잡스’를 인정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그만큼 장명식에 대한 램리서치사의 신뢰와 그의 기여도를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실제 램리서치사는 83년 장 사장과 에이전트계약을 할때만해도 본사직원이 70명에 불과했지만,지금은 7000명에 이를만큼 고속성장세를 구가하고 있다.

매일 램리서치의 천안공장과 화인반도체 수원공장을 오가며 ‘투잡스’생활을 이어왔지만,정작 본인의 사업체인 화인반도체는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97년 벤처열풍이 몰아닥치면서 장명식은 중대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장명식,그는 누구인가
53년 서울생.서강대 물리학과(71학번).반도체장비분야에 손꼽히는 전문가.서울일렉트론을 거쳐 87년 창업,벤처 1세대 CEO의 대표주자.매우 긍정적이며 낙관적인 성격의 소유자.강한 추진력과 위기관리능력이 탁월하다는게 주위의 평.뛰어난 친화력탓에 폭넓은 인맥을 자랑하는 반도체업계의 마당말.
취미 골프
운동모든 운동을 다 좋아하는 만능스포츠맨
존경하는 CEO잭웰치 GE 회장(독종이어서 존경한다.기업내 상위 30%의 직원만 교육시킨다는 경영철학은 정말 무섭다.성공하려면 저렇게 무섭게 해야한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친한 기업인김중조 성원에드워드 회장, 김덕룡 KMW사장
10년후 모습모습 그간 경험을 바탕으로 인적네트워크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고싶다.

◆ 제 2의 창업,장명식의 승부수

“장 사장,다른 회사들은 모두 코스닥이다 뭐다해서 회사를 폭발적으로 키우는데,언제까지 외국기업 지사장을 할 겁니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예요”

97년,주주들의 항의가 쏟아졌다.정신이 번쩍들었다.당시 화인반도체는 직원 40여명에 연매출 60억원을 조금넘는 규모로 근근히 버티고 있었다. 회사운영은 늘 ‘개발,자금과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장명식은 정작 화인반도체에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펠리클국산화가 제대로 되지않은데다,IMF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IMF는 상상하기 힘든 어려움을 안겨줬다.

특히 그는 화인반도체의 경우 일본 미쓰이케미컬,신에쯔케미컬,미 듀폰 등 우리로 치면 삼성그룹같은 거대기업과 직접경쟁을 해야하는 상황에 대해 엄청한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결국 독자기술개발에 한계를 느낀 장명식은 회사문을 닫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계란으로 바위치는 격이었습니다.이들 기업은 정말 거대한 벽이었습니다” 97년 봄,결국 사업을 접기로 마음먹었던 장명식에게 구세군 같은 손길이 다가왔다.

한국기술투자에서 50억원을 투자하겠다고 제안해온 것.본업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투자유치를 통해 확보한 자금으로 현재의 본사인 경기 기흥에 공장을 설립,공격적인 경영에 나섰다.

램리서치 일에서 손을 떼고,화인반도체에 집중했다.제 2 창업의 심정으로 매달렸다.드라이에처에 들어가는 온도조절장치인 ‘칠러’란 아이템을 추가,개발했다.

장명식의 놀라운 사업수완은 이때부터 다시한번 발휘되기 시작한다.그가 택한 결론은 ‘올인작전’. 확신하나로 밀어부쳤다. “길이 보여서가 아니라,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미친듯이 밀어부쳤던 것같습니다”

그는 하다가 안되면 장렬하게 산화,한줌의 재가된다는 각오로 달려들었다.칠러장비개발에 목숨을 걸었다.87년 설립후 10년가까이 연간 60억원도 채안되는 매출에 근근히 버텨온 상황은 99년을 넘기면서 빠르게 호전되기 시작했다.

펠리클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FST는 제품출시후 국내 펠리클시장을 빠르게 잠식,시장점유율 80%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어 드라이에처장비에 들어가는 ‘칠러’개발에 성공,또다시 납품에 성공했다.매출은 2001년 들어 급성장했다.2001년 100억원이던 매출은 매년 급성장,2003년 210억원,지난해에는 300억원대로 올라섰다.

펠리클과 칠러가 각각 매출의 절반씩을 차지할 정도로 칠러 역시 호조를 보였다.장 사장은 2001년,또한번 승부수를 던졌다.바로 LCD용 펠리클개발프로젝트.

또 2001년 액정표시장치(LCD)용 대형 펠리클 개발에 착수,일본 아사히 카사이가 독점하고 있는 세계 LCD펠리클시장에 과감하게 출사표를 던졌다.

4년 가까이 개발비로만 300억원을 쏟아붓는 초강수를 강행했다.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있었다.하지만 최근 국내 최초로 LCD용 대형 펠리클(390×610㎜)의 국산화에 성공,LG마이크론에 첫 공급했다.

제5세대 대형 펠리클(800×920㎜) 개발도 완료했다. FST의 LCD용 펠리클개발착수는 일본에 이어 세계 두번째. “LCD용 펠리클개발은 정말 어려운 분야입니다.지금까지의 경험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 장명식의 성공론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경우 주 5일근무는 근로자들 얘기입니다.오너와 개발자들은 하루 24시간 일합니다.잘나가는 다국적 기업 미국 본사의 경우 새벽 2,3시 미팅은 다반사죠”

그는 첨단분야의 세계적 기업일수록 핵심개발자와 오너들의 에너지와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강조한다.장명식 사장이 내세우는 성공론의 첫번째 키워드는 ‘목숨건 최선’

“사업은 정말 목숨걸고 해야 합니다.경쟁자가 봤을 때 정말 무서울 정도로 일해야 합니다.그래야 성공기회가 옵니다” 장명식은 막연히 최선을 다해서는 안되고 목숨걸고 최선을 다해야한다고 강조한다.

아침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에너지를 쏟는 근면성은 기본이란다.그는 성공한 사람은 그래서 업종을 바꾸더라도 성공할수 있다고 확신한다.

두번째는 ‘신뢰’란다. “사업은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합니다.신뢰가 바탕이 돼야합니다”. 그리고 인적네트워크를 최대한 구축하고,경영의 기본원칙을 충실히 지키는 것도 무엇보다 중요하단다.

“사업이란 고객이 필요한 것을 목숨걸고 수행하는 것입니다.고객을 위해,제품을 필요로 하는 수요자를 위해 목숨걸고 최선을 다할때만이 승부에서 이길수 있습니다”

그는 반도체,LCD용 검사장비는 이제 한국에서 시작할때가 됐다고 단언한다. “국내는 측정장비쪽이 약합니다.그동안 저급제품중심이었는데,한국도 이젠 고급제품쪽으로 장비국산화를 진행해야 합니다”

그는 한국기업의 경우 앞으로 진공상태에서 디바이스를 제조하는 광학,CVD 공정등의 최첨단 메인측정장비 국산화에 도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FST 역시 반도체,LCD 용 펠리클,칠러 등 소모품사업에 더욱 집중,18년간 해왔듯,앞으로도 한우물만 팔 계획이라고 강조한다.현재 매출의 30%가량을 해외시장에서 벌어들이는 장 사장은 글로벌비즈니스 확대를 위해 외국인을 과감히 채용할 계획이라고 소개한다.

FST 장명식 사장은 18년간 한 우물을 판끝에 FST를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가진 글로벌기업으로 일궈낸 전형적인 벤처기업가였다.그는 50대 초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계적 기업으로의 도약을 위해 오늘도 현장을 누비는 열정의 기업가였다.

[인터뷰를 마치며]

장명식 사장은 최근 지병으로 아내를 잃은게 사업후 가장 큰 슬픔이었다고 합니다.수술과 재발,그리고 투병끝에 운명을 달리한 아내곁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게 지금도 한이 된다고 합니다.그는 요즘 마음을 비울려고 노력한다고 합니다.권한을 임원들에게 대부분 넘겨주고,한발짝 뒤에서 경영을 챙기기 시작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합니다.

/김광일 객원칼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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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ST,어떤 회사인가
설립일1987년 9월
종업원 170명
자본금65억원
연락처(031)370-0700 www.fstc.co.kr
사업영역 반도체장비 및 소모품제조
경영계획 세계 3대 반도체종합메이커 진입
매출목표 2005년 450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