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금융사의 화형식'이 보고 싶다


[아이뉴스24 민병무 기자] 금융업계가 또 핵펀치를 맞았다. 환매 중단된 라임자산운용의 펀드 ‘플루토TF-1호(무역금융펀드)’ 판매사들은 피해자들에게 투자 원금을 전액 돌려주라는 결정이 지난 1일 나왔다. 일단 반환해야 할 돈은 2018년 11월 이후 판매한 1611억원이다. 판매사별로는 우리은행이 650억원으로 가장 많고 신한금융투자(425억원), 하나은행(364억원), 미래에셋대우(91억원), 신영증권(81억원) 순이다.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의 원금 100% 배상 결정은 금융투자상품 분쟁조정 사상 처음이다.

금융당국이 이처럼 전례 없는 전액 배상안을 내놓은 것은 이번 사태가 ‘단순 불완전 판매’가 아닌 ‘사실상의 금융사기’에 가깝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라임자산운용과 신한금융투자는 펀드 부실을 사전에 알고도 수익률이나 투자위험 등 핵심정보를 속여 가며 투자자들에게 계속 판매했다. 선량한 고객을 대상으로 교묘하게 사기를 친 셈이다.

금융정의연대 회원들과 사모펀드 피해자들이 지난 6월 3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금융감독원 앞에서 ‘사모펀드 책임 금융사 강력 징계 및 계약취소(100% 배상) 결정 촉구 금감원 의견서 제출 기자회견’에서 손피켓을 들고 집회를 하고 있다. [뉴시스]

라임자산운용은 2017년 5월부터 플루토TF-1호 펀드 투자금과 신한금융투자의 총수익스와프(TRS) 대출자금을 활용해 인터내셔널인베스트먼트그룹(IIG) 펀드 2개, BAF펀드, Barak펀드, ATF펀드 등 5개 해외 무역금융펀드에 투자했다. 이 중 IIG펀드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미국의 투자자문사인 IIG는 헤지펀드 손실을 숨기고 가짜 대출채권을 판매하는 등 증권사기를 저지른 혐의로 지난해 11월 등록 취소와 펀드 자산 동결 등의 제재를 받았다.

라임자산운용과 신한금융투자가 IIG펀드 부실을 처음 눈치 챈 것은 2018년 중반쯤이다. 이때부터 슬슬 ‘간 큰 행동’을 시작했다. IIG펀드가 기준가를 산출하지 않았는데도 그해 11월까지 기준가가 매월 0.45%씩 상승한 것으로 임의 조정했다. 한번 나쁜 길에 빠지니 더 나쁜 길로 가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환매 자금 돌려막기를 위해 IIG펀드와 다른 해외 펀드를 합쳐 모자(母子)형 구조로 변경했음에도 해외 무역금융펀드에 직접 투자하는 것으로 수익구조를 꾸몄다.

수법은 더 대담해졌다. 잘못을 숨겨야 하니 물불을 가리지 못했다. 2019년 1월 IIG펀드에서 투자금 2000억원의 절반인 1000억원을 날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알게 되고서는 투자펀드를 케이맨제도에 있는 특수목적법인(SPC)에 장부가로 처분하고 그 대가로 약속어음을 받는 구조로 계약을 변경하기까지 했다.

투자위험과 관련해서는 위험 등급과 보험 가입 여부 등을 허위·부실 기재했다. TRS 레버리지를 활용한 운용 방식 등을 고려했을 때 위험성이 1등급(매우 높은 위험)에 해당하지만 플루토TF-1호의 일부 자펀드는 3등급(다소 높은 위험)으로 표기됐으며, 부실이 발생한 IIG펀드에 상당 비중을 투자하고 있으면서도 펀드 수익 기대율을 6% 수준으로 기재했다.

금감원은 이 같은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계약체결 시점에 이미 투자원금의 상당 부분(최대 98%)에 달하는 손실이 발생한 상황이었음에도 이를 알리지 않아 투자자들의 착오(錯誤)로 인한 계약을 유발했다”고 결론지었다. 이에 따라 ‘운용사의 거짓 설명을 그대로 믿고 판매해 투자자 착오를 유발한 판매사는 투자원금 전액을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 금감원의 판단이다.

금감원이 100% 배상안을 내놓았지만 아직 갈길은 멀다. 우선 이번 분쟁조정안이 강제성이 없어 신청인(투자자)과 금융사 양측이 모두 조정안 접수 후 20일 이내 수락할 경우에만 효력이 발생한다. 통상 분조위 결정이 내려지고 난 뒤 일주일 내 금감원장 결재를 거쳐 권고안 결정문을 판매사에 송부한다. 이에 따라 늦어도 이달 마지막 주에 판매사들은 권고안 수용여부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은행 등 일부 판매사들은 자신들도 라임사태의 피해자라는 입장이라 조정안을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이 경우 투자자와 판매사·운용사간 복잡한 민사소송으로 이어지게 될 수 있다.

판매사의 반발은 이해되지만 정성웅 금감원 소비자권익보호 담당 부원장보의 멘트는 곱씹어봐야 한다. 그는 “최근 연이은 부실 사모펀드 발생으로 인해 다수 피해자가 양산되고 있어 신속한 피해구제 요청이 커지고 있는 상황이다”라며 “투자원금 전액 반환 결정이라는 지금까지 가보지 않았던 오늘의 이 길이 금융산업 신뢰회복을 향한 지름길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일단 계약 당사자인 판매사가 먼저 배상을 하고 최종 책임을 누가 지는지 여부는 금융사 간 소송 등을 통해 가려야한다는 것이 금감원 입장이다. 즉 어차피 엎질러진 물이지만 신뢰회복에 방점을 둬야 한다는 주문이다.

업종은 다르지만 잠깐 시계를 25년 전으로 돌려보자. 1995년 3월 9일 경북 구미 삼성전자 공장 운동장에 임직원 2000여 명이 모였다. 머리에는 품질 확보라고 쓰인 띠를 둘렀다. 운동장 한가운데에는 무선 전화기 15만개가 쌓여 있었다. 당시 삼성전자 이익의 약 4%인 500억원어치였다. 직원들은 자신이 만든 무선 전화기를 해머로 부순 뒤 불태웠다. 이른바 ‘무선전화기 화형식’이다. 발단은 설 선물로 임직원들에게 준 2000여대 무선전화기가 불량이었다. 삼성전자는 아예 고객에게 판매된 제품까지 모두 회수해 소각했다. 글로벌 삼성전자는 이런 뼈아픈 과정을 딛고 우뚝 섰다.

지난해 4월 윤석헌 금감원장을 만난 적이 있다. 이런 저런 이야기 중 그는 “한국금융에서 ‘삼성전자급 금융사’가 나오지 않는 이유는 바로 고객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오직 고객만을 위하여’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마음에 새기고 실천하면 삼성전자 뺨치는 금융사 탄생이 가능하다며 안타까워했다. 앞으로 정말 잘하겠다, 이번 한번만 더 믿어 달라, 시스템을 확실히 고쳐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립서비스는 이제 멈추자. 대신 냉철한 자기반성을 바탕으로 숨김없이 모든 잘못을 고백하는 ‘화형식’이 필요하다. 과연 어느 금융사가 1호 화형식을 할지 궁금하다.

/민병무 금융부 부국장 min66@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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