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 코너입니다. 판도라TV 김경익 사장의 파란만장한 10년에 걸친 벤처창업기는 어떻게 보셨는지요.
김경익 사장의 인터뷰는 무릇 사업가란 어떠한 난관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성공할수 있다는 확신에 찬 '자기체면술'의 비법을 갖고 있어야 함을 새삼 확인시켜준 인터뷰였습니다.
김경익 사장이 바통을 넘긴 113번째 릴레이인터뷰 주인공은 요즘 각광받고 있는 인티그런트테크놀로지즈 고범규 사장입니다.
"벤처기업을 창업,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모범답안처럼 보여주는 CEO입니다. 앞으로 세계무대를 흔들 잠재력 큰 경영자입니다."
두 사람은 아름아름 벤처기업가끼리 공부하는 스터디그룹 모임에서 알게돼 친하게 지낸다고 합니다.
인티그런트테크놀로지즈 고범규(39) 사장이 어떤 의미에서 벤처창업의 모범사례로 평가받는지,그의 사업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세계 최초로 독자 개발한 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폰용 튜너칩 하나로 창업 7년만에 매출 350억원에 순익 150억원대를 일궈낸 초우량 벤처기업이 등장, 화제다.
주인공은 DMB폰에 들어가는 튜너칩 국내 시장의 50%를 거머쥐고 있는 인티그런트테크놀로지즈. 6월 기업공개를 앞둔 이 회사는 요즘 증권가에서 벌써부터 시가총액 1천500억원대를 넘나들 블루칩으로 평가받는 등 또한번의 대박신화를 예고하고 있다.
특히 인티그런트는 그 어렵다는 반도체설계 분야에 뛰어들어 불과 7년이 채안되는 짧은 기간만에 세계시장을 장악할만큼 독보적인 기술력과 무한한 시장성을 확보, 벤처창업의 대표적인 모범 성공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고범규 사장은 차분한 스타일의 CEO다. 유독 강렬한 눈빛이 인상적이다. 서른셋살에 창업, 올해로 7년차를 맞는 고 사장은 그간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은후 터득한 여유로움탓인지, 매우 자신감 넘치는 모습니다.
고 사장은 매우 낙관적인 듯하면서 집요한 스타일의 경영자다. 스스로 엔지니어출신인 점을 의식해서인지, 늘 책을 곁에두고 부족함을 채우는 학구파 CEO다.
반도체설계 개발자출신이지만, 전략과 마케팅, 그리고 조직관리에 관한한 한껏 물오른 완숙한 경영수완을 자랑한다. 고 사장은 한눈에도 매우 반듯해보인다.
조직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세워놓은 나름의 원칙과 핵심가치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하다.대충대충이 아니고, 명확하고 반듯한 기준과 원칙을 제시한다.
고 사장은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다. 작지만 독특한 기업철학과 국제무대에서 통할수 있는 경쟁력있는 기업문화를 만들기 위해 늘 실험하고 시도한다.
실제 고 사장의 창업스토리는 창업아이템 발굴에서부터, 고통스런 난관을 헤쳐나가는 시련의 세월, 그리고 결국 한번의 기회를 웅켜쥐고 성공신화를 일궈낼때까지 벤처기업가가 걸어야할 모범답안을 보여주고 있다.
시장과 기술트렌드에 대한 그의 감각은 아무 논리정연하다. 회사와 제품이 가야할 방향에 대해서도 그는 명쾌한 나침반을 제시한다. 인티그런트는 세계 최초로 DMB 튜너칩을 개발한 벤처기업. 보유특허건수가 113건에 이를만큼 세계적 수준의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
DMB 튜너칩은 방송신호를 수신, 원하는 채널의 방송만 골라내는 핵심부품. 이 회사는 지난해 170억원, 올핸 350억원의 매출을 바라보는 유망 블루칩으로 최근 기업공개에 성공, 6월부터 거래된다.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글로벌 DMB칩'을 개발, 2008년 1억달러의 매출을 올린다는 다부진 청사진을 제시한다.
◆ 서른셋의 선택, 홀로서기
"고과장, 병역특례가 풀리면 연봉이 2배 뛸텐데, 무슨 사표야? 빨리 출근하게."
99년 12월말,삼성전자 연구원이던 고범규는 사표가 수리되지 않자 최후의 수단을 결행한다.
2개월간 무단결근을 강행한 것. 반도체개발파트 핵심인재였던 그는 우여곡절끝에 2001년 5월말, 삼성전자를 그만둘수 있었다. 30대초반의 그는 여느 직장인과는 달리 생각깊은 젊은이였다.
그는 이미 KAIST박사과정중 삼성전자가 '찜'할 정도로 촉망받는 엔지니어였다. 박사공부가 끝나자마자 특채된 그는 반도체연구소에 입사, 개발자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휴대폰용 RF칩개발을 담당했다. 고범규는 90년대 중반부터 RF연구를 해온 국내 대표적 1세대 RF칩 개발자. 당시 삼성전자는 휴대폰용 핵심부품 국산화를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고의 개발환경을 제공한 삼성전자도 그에겐 2% 부족했다. 개발자로써 자부심을 가질수 없었던 것. 이유는 당시 삼성 RF칩 로드맵 자체가 '퀄컴 따라가기'에 급급했기 때문.
"서울대, KAIST박사 아무리 많아도 소용없었죠. 항상 퀄컴을 뒤쫓아야만 했으니까요." 죽자살자 개발하지만,개발한 제품은 늘 팔지를 못하는 상황이 이어졌다.
6개월후면 퀄컴은 이미 다른 제품을 내놓고 시장을 장악했기 때문. 새로운 것을 얻으려면, 갖고있는 걸 버려야한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고민끝에 독립을 결심한다. 청년 고범규는 연봉에 크게 연연하지 않았다.
30대에는 자신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많은 투자를 해야하기 때문에 돈몇푼 더 받는 것은 그리 중요치 않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곧 병특이 풀리면 연봉이 2배로 뛰는 상황에서도 과감히 사표를 던질수 있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99년 12월, 망설임없이 사표를 던졌다. 놀라운 사실은 구체적 계획없이 무작정 사표부터 던졌다는 점. 이 때부터 고범규의 동물적 비즈니스감각이 잠에서 깨어난다.
퇴사후 그는 미국 실리콘밸리부터 찾는다. IT 트렌드와 창업, 경영에 대해 두루 귀동냥을 하기위해서였다. 두어달간 실리콘밸리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선배를 찾아가 물어보기도 하고, 각종 학회, 세미나에 참가, 열심히 귀를 세웠다. 귀국후에도 선후배를 찾아가 무작정 묻고 들었다. 기다리다 자정에 만나기도 하고, 대전집까지 오가는 시간이 아까워 모텔에서 잠을 청할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사는 회사를 창업할 경우, 어떤 일들이 생길지를 파악하는 것. 그에겐 모든게 주옥같은 메시지였다. 그렇게 학습은 3개월간 이어졌다. 무엇을 할 것인가?
듣고 내린 결론은 엄청난 가시밭길같은 '고생길'에 접어들었다는 점과 성공확률은 5%가 채안된다는 사실이었다. 7월 중순, 고범규는 지나가는 말투로 던진 선배의 얘기에 귀가 번쩍뜨이는 느낌을 받는다.
"RF관련 회사를 한번 만들어봐."라는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쳤다. 기회는 늘 가까운 곳에 있다는 평범한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실제 박사과정과 직장생활을 포함,10년가까이 RF분야 연구를 해온 게 아닌가? 어느 분야보다도 자신이 있었다.
2000년 7월초 그는 기어코 사고를 친다. 6억원을 마련, 회사를 설립했다. 분당에 10평남짓한 1층 가게를 얻었다. RF개발 전문가를 수소문한 끝에 하이닉스에 다니던 김보은 현 인티그런트 연구소장을 비롯, 핵심개발자를 무작정 만나 창업을 제안한다.
이미 RF분야에서 고범규의 명성을 듣고 있던 이들은 선뜻 동참한다. 2001년 1월, CDMA칩 개발에 착수했다. 퀄컴이 하지않는 니치마켓을 겨냥했다.그때 그의 나이 서른셋. 꿈에 부푼 고범규는 앞으로 닥칠 지긋지긋한 돈과의 싸움, 지루한 개발과의 전쟁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채 들뜬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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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EO,인고의 세월
"사장님, 하도 딱해서 드리는 말씀인데요, 어디가서 (투자자한테) 모바일기기로 TV를 볼 수 있다는 얘기는 하고 다니지 마세요. 그냥 CDMA칩 개발한다고 하세요."
2001년 여름, 투자유치를 위해 열심히 사업설명을 끝낸 고 사장은 한 벤처캐피탈리스트의 한마디 충고에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 맞은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후로도 30여차례 퇴짜를 맞는다. 투자사 사무실을 나설때마다 누군가는 알아줄 거라며 수없이 마음을 다잡았다. 숱한 문전박대에도 흔들리거나 결코 지치지 않았다.
"개발만 끝나면, 갚을수 있습니다." 2001년 4월, 통장잔고가 바닥을 드러내자 고범규는 본격적으로 돈을 꾸러 다니기 시작한다. 1년은 거뜬히 버틸줄 알았던 초기자금은 6개월도 채 안돼 바닥났다.
부랴부랴 4억원을 차입, 제품개발을 계속 밀어부쳤다. 하지만 개발은 지지부진, 끝없이 늘어졌다. 반도체설계는 100억원대가 넘는 천문학적인 자금을 필요로 했다. 달랑 6억원으로 승부를 걸겠다는 자신의 발상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그의 CEO로써의 자질은 이때부터 반짝반짝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초보 CEO였지만, 그는 놀랍게도 160억원이 넘는 개발자금을 끌어들이고, 춥고 어두컴컴한 4년간의 긴 터널속에서 참고 견딘후 세계적 기업, 삼성전자 납품에 성공한 것.
그는 우선 CEO로써 해야할 롤을 정확하게 찾아낸다. 개발자출신이지만, 그는 처음부터 개발에는 손도 안대는 결단을 내린다. 직원들은 "가장 잘하는 사람이 설계를 안하겠다니 말이 되느냐", "힘드니까 피한다"는 등 불만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확고했다. 자금과 전략, 두가지가 손에 잡히면 개발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당장 월급줄 돈이 없는 상황에서 CEO가 연구실에 박혀 설계에 매달릴수는 없다는게 그의 판단. 회사와 직원들의 미래를 보장해줄 전략을 어떻게 짤지도 최대 고민이었다.
"벤처는 밀림을 헤쳐나가는 것과 같더라구요. 칼을 휘두르며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높은 나무에 올라가 어디로 갈지를 알려주는게 더 중요합니다. 그게 CEO의 역할입니다."
고범규가 처음부터 개발에 손도 대지않고, 또 임원들에게 칼을 쥐어주고 앞으로 헤쳐나갈 것을 주문한 것도 이런 '밀림론'때문. 자금과 전략 두가지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내린 결론이었다.
2001년초,고범규는 인티그런트의 미래를 결정지을 중요한 모티브를 잡는다. 이미 삼성전자 연구원시절부터 휴대폰 트렌드를 꽤차고 있던 그는 PC로 TV보는 시대가 있었듯이 휴대폰으로 TV를 보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측했다.
"휴대폰은 여러 기능을 갖춘 개인통합기기로 발전합니다. 가장 좋은 컨텐츠는 방송이고, 이런 방송컨텐츠를 휴대폰으로 역세스하기 위해서는 휴대폰에 TV기능이 당연히 들어가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죠."
"TV를 반도체칩으로 개발, 휴대폰에 장착할수만 있다면?" , 2001년 2월, 고범규는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이때부터 MBI(Mobile Broadcasting Integration)에 승부수를 던진다.
놀라운 예측력이었다. 그의 판단은 훗날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고, DMB시장이 만개하면서 인티그런트의 대박신화를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된다.
하지만 문제는 자금. 2001년 당시만해도 "휴대폰으로 TV를 볼수 있는 칩을 개발한다"는 고 사장의 사업계획에 대한 국내외 투자자의 반응은 냉담했다.
40여개 투자자를 찾았지만 모두 허탕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 가? 2001년 가을, KTB네트워크로부터 8억원의 투자를 비롯, 국책과제기금 10억원 등 총 18억원의 개발자금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휴대폰으로 TV보는 시장이 올 것이라 확신한 그의 선견지명이 어느정도 앞선 감각이었는지는 세계적 회사인 퀄컴이 인티그런트보다 3년이나 지난후에 개발에 착수한 것을 보면 쉽게 짐작할수 있다.
그는 2001년부터 MBI개발에 모든 것을 건다. 그의 모든 것을 건 배팅이었다.
◆ 고범규의 질주본능
2003년 가을, 미 실리콘밸리중심지 산타클라라시에 위치한 인텔본사. 인텔캐피탈 투자심사역들은 한국에서 날라온 젊은 벤처기업가의 제안에 놀라움과 함께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앞으론 휴대폰으로 TV를 보는 시대가 곧 도래할 것입니다. 저희 회사에서 휴대폰으로 TV를 볼수 있는 DMB폰 튜너칩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기 때문입니다."
2001년부터 3년간 진행된 투자유치는 그의 열정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자금은 바닥나고, 투자유치는 언제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년 수십억원의 개발비가 필요한 칩설계는 그야말로 피말리는 '돈'과의 전쟁 그자체였다.
매출이 전무한 4년간, 그는 매일 매일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가슴을 안고 자본과 사투를 벌이는 고독한 레이스를 이어가고 있었다. 수십번의 도전끝에 결국 그는 투자유치에 잇따라 성공하며, 4년여의 고단한 개발과정의 역경을 이겨낸다.
2002년 국내 기관투자자로부터 36억원, 2004년에는 인텔, 일본 제프코 등 외국계 기관투자자로부터 100억원대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한다. 인텔이 국내 반도체설계회사에 투자하기는 인티그런트가 처음이었다.
더 많은 금액을 투자하겠다는 인텔의 제안을 겨우 뿌리치고 200만달러를 투자받았다. 2003년봄, 또다시 고민에 휩싸인다. 개발은 끝났지만, 영업이 문제였다. 대리점계약을 맺고 유통회사에 맡겼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삼성전자는 "칩양산이나 해봤냐"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행운은 늘 도전하고 포기하지 않는 자의 몫인 법. 2003년 10월, 고범규는 한통의 전화를 받고 뛸듯이 기뻐했다. 삼성전자로부터 칩을 납품해보라는 연락을 받은 것.
삼성전자는 이미 DMB폰 개발을 위해 핵심칩을 미국 회사에 의뢰, 개발중이었다. 문제는 미국 회사가 납기를 지키지 못한 일이 터진 것. 엉겁결에 납품요청을 받았지만, 인티그런트는 정확하게 요구한 납기에 맞춰 납품했다.
미국 회사는 결국 6개월이 지나도록 DMB폰 칩납품에 실패했다. 이때부터 인티그런트를 대하는 삼성전자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신뢰가 쌓이기 시작했고, 삼성의 2차 DMB폰모델 칩개발도 인트그런트에게 떨어졌다.
그는 우연히 찾아든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2004년말, 꿈에 그리던 삼성전자 납품이 시작됐다. 이어 2005년 1월, 세계 최초로 위성DMB폰에 튜너IC칩을 탑재하는데 성공한다. 인티그런트는 이때부터 무서운 속도로 성장질주를 이어간다.
세계 최고 수준의 삼성전자에 납품하자, 다른 휴대폰메이커 및 PMP, PDA 등 포터블기기업체에 대한 납품은 탄탄대로였다. 삼성에 이어 LG전자 납품에도 성공하면서 인티그런트는 DMB폰 튜너칩 리딩기업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2003년 5억원도 채 안되던 매출은 2004년 43억원으로 껑충뛴데 이어, 2005년부터는 DMB폰시장이 터지면서 가파른 상승세를 시작했다. 2005년 곧바로 170억원의 매출에 순익 86억원을 기록한 데이어, 올해엔 350억원에 150억원규모의 흑자를 달성할 것으로 예상되는 등 말그대로 파죽지세다.
인티그런트의 잠재력은 폭발적인 성장을 앞둔 DMB시장에 근거한다. 인티그런트가 개발한 칩은 국내 모든 DMB폰에 장착되기 때문.
"경쟁 업체가 등장했지만, 향후 2년간 시장점유율 40%만 유지해도 내년 매출이 8천만 달러, 2008년이면 1억2천만 달러는 무난히 달성할 것입니다."
인티그런트의 기술력은 113건에 달하는 특허보유건수에서 쉽게 짐작할수 있다. 국내 DMB시장이 커지고, 해외 DMB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릴수록 향후 인티그런트의 볼륨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할 것이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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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범규의 성공론
고 사장이 막대한 자금력과 세계 최고수준의 기술력을 요구하는 반도체설계분야에서 어렵사리 성공신화를 만들어낸 것은 세가지 결정적 성공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요인은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예측해내는 시장예측력. 아무도 생각지 못한 '휴대폰으로 TV를 볼 것'이라는 발상을 2001년초에 해낸 것. 그 놀라운 발상은 위성DMB, 지상파 DMB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두번째 요인은 꺼지지 않는 열정.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투지와 넘치는 전투력은 그를 지탱해준 동력이다. 숱한 좌절의 고비를 넘기고 인티그런트가 세계적 기업으로 발돋음하게 한 핵심적 요인이기도 하다. 세번째는 타이밍에 맞게 대규모 개발자금을 이끌어낸 투자유치능력.
정작 고 사장 본인이 생각하는 벤처기업가의 성공조건은 무엇일까? 성공론의 첫번째 키워드는 멀리보며 미래를 준비하는 '큰 그릇론'이다. "생각은 크게, 꿈은 높게해야 합니다. 연봉에 연연하면 미래를 못봐요. 끊임없이 생각의 크기를 키워 자신의 그릇을 키워야 합니다."
두번째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줄 아는 '오감론'을 제시한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전략과 정신, 자세, 그리고 창의력, 열정, 적극성 등 보이지 않는 것에 눈을 떠야 합니다."
오감을 최대한 발달시켜야 한다는 독특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사람에 대한 공부와 인문학, 많은 생각과 고민을 통해 오감능력을 키워야 한단다. 실제 그는 기술개발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별로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세계 유일의 핵심기술을 갖고있다고 자랑하는 것은 우스운 일입니다.v기술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순간,v위기입니다.v기술은 바뀌고,v경쟁사에서 쫓아오기 때문에 기술차별화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v결국 보이지 않는 강점(Invisivible Strength)을 누가 갖고있느냐가 핵심입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진단이다. 이러한 철학을 직원들이 깨닫도록 하는게 CEO의 역할이라고 지적한다. 회사의 핵심적인 가치를 지속적으로 만들고 얘기하다보면 기술은 자동으로 생긴다는게 그의 지론.
고 사장이 제시하는 세번째 성공론은 역시 '열정'이다. "흔들리면 안됩니다. 사업을 하다보면 유혹은 끝이없죠. 편하기 위해 한번 원칙을 무너뜨리면 끝이죠. 독하게 버텨야 합니다."
시장을 예측하고, 리스크를 걸고 어려운 방식을 택하는 도전정신과 배팅, 그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는 인내가 더해져야만 그 어둡고 컴컴한 터널을 빠져나올수 있다고 진단한다.
고 사장이 제시하는 조직관리 철학의 핵심은 ‘자발적 참여의식 만들기'다. "모든 직원에게 최대한 많은 일에 참여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게 중요합니다. 이를통해 회사가 자신의 의견을 듣고 있음을 느끼게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의 성장커브와 회사의 성장커브가 엇갈리는 성장통을 겪으면서 CEO를 포함한 어느 누구도 자리를 보장받을수 없다는 비장한 자세를 가져야한다고 지적한다.
"어느 순간, 안정을 느끼면 위기입니다. CEO를 포함한 공동창업자라도 이러한 원칙에 방해가 되거나 기득권을 주장하면 안됩니다."
인티그런트의 미래는 세계 모바일TV시장에서 최고의 DMB칩을 파는 거란다. 이미 수출길을 튼 일본에 이어 중국, 미, 유럽 등 전세계에 DMB폰을 공급할 계획이란다.
전세계에서 통용되는 '모바일TV 로밍칩'을 개발하는 것도 또다른 목표다. 이를통해 2008년 1000억원의 매출목표를 달성한다는 게 그의 포부다. 고범규 사장은 남들이 생각지 않은 것을 생각하고, 또 남들이 가지않는 어려운 길을 택한 모험기업가의 전형이었다.
그리고 7년간의 숱한 고난의 세월을 견디며 끝내 성공신화를 일군 투지넘치는 작은 거인이었다. 고범규 사장이 앞으로 어떻게 세계 DMB시장을 석권해나갈지, 벌써부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며]
고 사장의 집무실 한켠에는 영어 약자로 된 'PCCP'란 네가지 항목을 적어놓은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그는 늘 예측력과 도전정신,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인내심 등 네가지 영어약자를 줄인 PCCP를 가슴에 새기며 산다고 합니다. 직원들에게 주문하는 메시지 역시 PCCP라고 합니다.
/김광일 객원컬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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