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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호 별세] 농심 신춘호 회장은 어떻게 회사를 키웠나?


35세 사업 뛰어든 신춘호 회장…후발주자에서 업계 1위 차지

신춘호 회장 [사진=농심]
신춘호 회장 [사진=농심]

[아이뉴스24 김승권 기자]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이 92세의 나이로 27일 별세했다. 농심을 창업한 지 56년 만이다.

신춘호 회장은 신격호 회장의 동생이다. 둘째 동생인 신철호 회장 다음의 셋째 남자 형제다.

신춘호 회장은 라면 하나로 연 매출 2조원대를 넘나드는 식품업계의 '대부'로 통한다. 큰형인 신격호 회장이 형제들 중 맨 처음으로 사업에 뛰어들게 되다 보니 동생들도 하나 둘 사업에 투신했다. 신춘호 회장은 30대 중반을 넘어 형들과 함께 사업에 뛰어들었다.

신춘호 회장이 농심을 창업하게 된 것은 '라면'에 대한 생각이 형인 故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 달랐기 때문이다.

롯데그룹에서 故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을 도와 함께 사업을 키우던 두 형제는 '라면'에 대한 생각에서 서로 갈렸다. 새로운 사업으로 라면을 생각한 신춘호 회장과 '밥 대신 라면을 먹을 사람이 있겠느냐'는 신격호 총괄회장 사이에 의견이 엇갈렸고 결국 동생은 롯데그룹을 떠났다.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은 1999년 쓴 '철학을 가진 장이는 행복하다'란 제목의 자서전에서 "신적인 존재나 마찬가지였던 큰형이 반대하자 일종의 오기가 생겼다"고 회고한다.

◆ 서른 다섯 나이에 '혈연단신' 창업...롯데공업사로 사업 시작해 소고기 라면으로 히트

당시 신춘호 회장의 나이는 서른 다섯이었다. 롯데그룹을 나온 신 회장은 서울 영등포 대방동에 '롯데공업사'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시작했다. 신춘호 회장은 원래 형과 다른 사업을 하기 위해 원래 식품사업이 아닌 시계 공장을 준비했다. 하지만 사업을 준비하며 마음을 바꾸고 라면사업을 시작하게 됐다.

신춘호 회장은 1965년 자본금 500만원으로 지금의 농심 사옥이 있는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에 라면 뽑는 기계를 들여놓고 라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신 회장은 자체 연구소를 만들어 기호에 맞게 라면 개발을 시작했다. 라면의 원조인 일본기업과의 기술제휴가 사업 초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독자적인 성장에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농심의 첫 제품은 1965년 9월 당시 유행하던 닭고기 육수를 사용한 '롯데라면'이었다. 그러나 농심은 라면의 재료로 소고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닭고기보다 소고기를 좋아하는데 소고기국의 깊은 맛을 라면으로 구현해보자'는 생각에서다.

농심은 1970년 10월 소고기 국물을 재료로 한 '소고기라면'을 출시하고 국내 시장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그 결과 시장점유율도 10%대에서 22.7%로 끌어올리며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후 1975년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카피로 인기를 끈 '농심라면'을 출시했다. 농심라면의 큰 인기로 1978년 회사명을 지금의 '농심'으로 바꾸고 라면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또한 인스턴트 자장면 개발에도 나섰다. 신 회장은 1970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인스턴트 자장면 개발에 성공하게 되고 이것을 전국에 보급하게 된다. 이때부터 매운 양념이 들어가는 일반 라면뿐만 아니라 자장면을 손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자장라면 열풍'이 불기 시작한다.

1981년에는 처음으로 용기에 물을 부어 먹는 사발면을 개발해 라면시장에 일대 '혁명'을 가져왔다. 이후 출시하는 상품마다 ‘대히트’를 기록하며 라면시장에서도 1980년 후반까지만 해도 삼양식품, 오뚜기, 팔도식품, 청보식품 등의 '라면 춘추전국 시대'로 불렸지만 이후 터진 '우지라면 파동' 이후 라면시장에서의 무게 추는 농심으로 기울게 된다. 바로 이때 가장 큰 경쟁사였던 삼양을 제치고 업계 최고의 자리까지 등극하기에 이른다.

신라면이 나온 건 1986년이다. 신회장은 1986년 10월 '깊은맛과 매운맛이 조화를 이룬 얼큰한 라면'이라는 콘셉트 하에 확고한 1위 독주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신라면을 개발했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얼큰한 소고기장국의 매운맛을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신라면은 출시되자마자 가파른 매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초기 소비자들은 '얼큰한 국물맛도 좋고 면도 맛있다'는 반응을 보였다. 출시 첫해 석 달 동안 30억원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시작으로 이듬해인 1987년에는 무려 180억원을 상회하는 매출을 올리며 국내 라면시장의 대표주자로 뛰어 올랐다.

라면 외 사업군에서도 식품업의 본질에 투자해 성공을 거둔 사례가 많다. 농심의 제품엔 '최초'라는 수식어가 많이 따라붙는다. 트럭 80대 분량의 밀가루로 수천 번 실패하다 제조해 낸 국내 최초의 스낵 새우깡, 국내 최초의 쌀면과 건면 특허 기술 등이 수많은 도전 끝에 만들어진 결과다.

초창기 농심 대방 공장 모습 [사진=농심]
초창기 농심 대방 공장 모습 [사진=농심]

◆ '기술 개발' 강조한 신춘호 회장, 스위스 알프스까지 신라면 판매 확대

1965년 9월18일 창립 이후 신춘호 회장의 농심은 반세기 동안 신라면과 새우깡 등 식품 중심의 한우물 경영으로 업계 선도기업으로 성장했다. 전 세계 약 100개국에 수출하는 글로벌 식품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신 회장은 기술 개발을 가장 강조해 성공한 기업인으로 꼽힌다. 기술이 곧 품질이고 혁신이라고 믿어온 신 회장은 2010년부터 직원들에게 "식품도 명품만 팔리는 시대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그는 또 "라면 업계 지난 50년이 스프 경쟁이었다면 앞으로 50년은 제면 기술이 좌우할 것"이라며 "다른 것은 몰라도 경쟁사와의 연구개발(R&D) 역량 경쟁에서 절대 뒤지지 말라"고 강조했다. 굵은 면발 열풍을 일으킨 짜왕과 맛짬뽕(2015), 신라면의 제 2전성기를 이끈 신라면건면(2019) 등 혁신 제품들은 이 같은 전략의 결과물이었다.

기술과 품질을 강조로 농심 제품들은 해외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신 회장은 1980년대부터 "세계 어디를 가도 신라면을 보이게 하라"고 말하며 수출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이 때문에 국내 식품회사 중 가장 먼저, 가장 공격적으로 해외에 진출했다. 라면을 처음 수출한 것은 1971년. 창업 6년 만이었다. 농심의 눈은 이후 늘 세계 무대를 향했다. 남극의 길목부터 알프스 최고봉에서까지 '신라면'을 팔고 있다.

해외에서의 성과는 느리지만 견고하게 '초격차 경쟁력'으로 이어졌다. 농심의 라면 수출액은 2004년 1억달러를 넘었고, 2015년엔 5억달러를 돌파했다. 지난해 농심은 전체 매출의 약 40%인 1조1천억원을 미국과 중국 등 해외에서 달성했다. 농심의 올해 해외 매출 목표는 전년보다 15% 이상 높여 잡았다.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는 뿌리에는 국내 농가와의 상생도 자리잡고 있다. 신 회장이 롯데그룹에서 완전 분리해 1978년 사명을 '농심'으로 바꾸며 제 2의 창업을 하며서 "먹거리의 기본인 농산물을 만든다는 마음이 담았다"고 했다. 농심이 지금도 과자와 라면 제품 등에 국내산 아카시아 꿀, 완도산 다시마, 국내산 감자 등을 적극 고집하고 있는 이유다.

신 회장은 언론 노출을 극도로 꺼린 은둔형 경영자이기도 했다. 기업가는 화려한 포장과 이미지보다 비즈니스 자체로 평가 받아야 한다는 철학에서다.

신 회장은 2003년 농심을 인적 분할해 지주회사 '농심홀딩스'를 신설했다. 현재 상장, 비상장, 해외법인 계열사 총 35개사를 산하에 두고 있다. 국내 계열사는 19개다. 상장사는 농심홀딩스, 농심, 율촌화학 등 3곳이다.

/김승권 기자(peac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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