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8일 밤에 프랑스 파리로 출장을 온 A씨는 다음날 아침 호텔 조식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그런데 식당은 이미 텅텅 비었고 입구엔 10시까지만 식사를 제공한다는 안내 팻말이 붙어 있었다. 지난 밤 현지 시각에 맞춰놓은 A씨의 시계는 분명 9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는데 왜 벌써 문을 닫은 것일까.
이 황당한 일은 바로 서머타임으로 인해 일어난 에피소드다. 올해 프랑스 파리에서는 3월 29일 새벽 2시에 시계바늘을 3시로 맞췄다. 따라서 그날 A씨의 시계만 오전 9시 30분이지 파리의 다른 시계는 모두 10시 30분이었던 것이다.
'일광절약시간'이라고도 불리는 서머타임은 여름철에 표준시보다 1시간 시계를 앞당겨 놓는 제도다.서머타임을 처음 착안한 이는 미국의 과학자이자 정치가, 언론인이었던 벤저민 프랭클린이다. 그는 파리 주재 미국 대사로 일하던 1784년 한 잡지 편집장에게 서한을 보내 하절기에 일찍 일어나면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뿐더러, 밤에 소모되는 램프 기름도 절약할 수 있다며 파리지엥들이 일찍 일어날 것을 제안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서머타임을 논의한 이는 뉴질랜드의 곤충학자인 조지 버논 허드슨이다. 낮에 우체국에서 일하고 저녁에 곤충을 채집하던 그는 1895년 '여름철 시간을 2시간 당기자'고 제안했다. 일을 빨리 마치고 곤충 채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1907년에는 영국의 건설업자 월리엄 월릿이 서머타임 도입론을 담은 '일광의 낭비'라는 저서를 펴냈다. 일과 후 골프를 즐기고 싶었던 그는 연료 절약 및 건강 증진을 내세워 서머타임 도입을 적극 주장했다. 일광 절약 법안을 만들어 의회에 제출하고 국왕과 총리까지 찾아다녔으나 결국 부결되고 말았다.
그런데 서머타임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16년 독일에서다. 제1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던 독일은 당시 동맹국인 오스트리아와 함께 석탄 사용을 줄이고 공습에 대비한다는 목적 하에 그해 4월 30일 기준시간을 1시간 앞당겼다.
뒤를 이어 네덜란드, 덴마크, 영국 등 여러 유럽 국가들이 서머타임을 실시했으며, 전쟁 뒤에는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등이 채용했다. 이후 서머타임은 한동안 외면돼 오다가 1970년대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빠르게 확산됐다. 서머타임의 첫 시행과 확산이 전쟁과 고유가와 연관돼 있다는 건 그만큼 경제적 효과가 크다는 걸 의미한다.
미국 교통국은 서머타임 실시로 가정용 전기사용량을 1% 절약할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내놓았으며, 2007년 미국 에너지부에서도 서머타임을 실시할 경우 전력 소비량이 약 0.5% 감소한다고 밝혔다. 또한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이 지난해 내놓은 보고서에 의하면 서머타임 실시로 한 해 약 7천960억 원의 에너지 절감 효과를 거두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조지 허드슨과 월리엄 월릿이 곤충 채집 및 골프를 즐기기 위해 서머타임 도입을 처음 주장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서머타임을 실시하면 레저 생활을 활성화하는 효과도 분명히 있다. 우리나라는 1948~1960년과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7~1988년에 서머타임을 실시한 바 있다. 그런데 88서울올림픽 당시 서머타임 실시로 인해 술집 매출은 30% 이상 급감한 반면 볼링장 및 극장, 헬스클럽 등 취미․레저산업 매출은 10~20% 늘었다.
하지만 변화된 시간 패턴으로 생활 리듬이 깨진다는 시민들의 불만으로 1989년 폐지된 이후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서머타임을 시행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서머타임은 우리의 시간을 미래로 한 시간 앞당기긴 하지만 시행 이후 생체리듬이 깨지는 기간은 약 1~3주일이나 지속된다.
이처럼 생체리듬이 깨져 잠을 제대로 못 잘 경우 다양한 이상 증상이 발생할 수 있다. 미국 오리건대학의 데이비드 와그너 교수팀이 2014년에 발표한 연구결과에 의하면, 서머타임 실시로 인해 수면을 제대로 취하지 못할 경우 배우자 및 파트너와 싸울 확률이 높아지며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강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상대방의 감정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서머타임이 심장마비 가능성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들도 적지 않다. 2008년 <뉴잉글랜드 의학저널>에 발표된 연구에 의하면 서머타임 실시 후 심장마비 건수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특히 서머타임 첫날이 월요일인 경우 심장마비 발생 가능성이 5~10% 가량 높아질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발표된 바 있다.
그런데 최근에는 서머타임의 가장 큰 장점인 에너지 절약 효과에 대해 반박하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어 눈길을 끈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핸드릭 울프 교수가 1995년부터 2005년까지 7년 동안 서머타임을 시행하는 곳과 시행하지 않는 호주의 두 지역 간 전력 소비량을 비교한 결과, 전력 소비량에서 큰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난 것. 그 이유는 서머타임 시행 지역에서의 밤 전력 소비량은 감소하지만 아침에는 증가하므로 전체적인 전력 소비량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는 것이다.
또한 예일대 매슈 코첸 교수가 2006년 처음으로 주 전역에서 서머타임을 시행한 인디애주 주에서 시행 이전과 이후의 전력 소비량을 비교한 결과, 서머타임이 오히려 전력 수요를 높인다는 결론이 도출되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 코첸 교수는 시대가 달라져 이제 가정에서 조명을 밝히는 것은 전력 소비량의 극히 일부분을 차지하며 냉난방의 전력 소비량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런 연구결과 때문인지 몰라도 서머타임제 효과를 둘러싼 찬반 논란이 확산되면서 미국에서는 현재 서머타임 폐지를 논의하는 주가 11곳에 이른다. 반면에 지난 2월 미국 뉴멕시코 주상원은 서머타임을 1년 내내 유지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이제는 서머타임의 효과로 에너지 절약만을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보인다. ‘우리는 늘 서머타임을 시행했었으니까…’라는 수동적인 자세가 아니라 냉정한 분석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 : 이성규 과학칼럼니스트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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