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수기자]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원화 대비 엔화 가치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국내 수출기업들, 특히 완성차업계가 흔들리고 있다. 이미 주요 수출 시장 중 하나인 미국에서 현대·기아자동차의 판매 실적이 뒷걸음질 치고 있다.
지난 4일 오후 3시 기준 서울외환시장에서 원엔 환율은 100엔당 949.46원으로 마감했다. 마감시간 기준으로 원엔 환율이 940원대를 기록한 것은 지난 2008년 8월 이후 6년 2개월 만에 처음이다.
특히 일본 브랜드와 북미 지역에서 점유율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현대·기아차에게는 엔화 가치의 하락은 가격 경쟁력 약화로 직결될 수밖에 없다.
아베노믹스를 등에 업은 일본차들의 '몸값'이 가파르게 하락하면서 일본차와 미국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는 현대·기아차는 가격 경쟁력 하락에 따른 판매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실례로 현대차는 올해 북미 시장에 쏘나타 주력 모델의 가격을 2만3천175달러로 책정했으나 최근 토요타가 캠리 주력 모델의 가격을 2만2천870달러로 쏘나타보다 더 낮은 가격에 출시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쏘나타는 가격면에서 캠리보다 400~500달러 정도 낮춰 판매해왔다. 하지만 엔저 효과가 지속되면서 1년 만에 가격이 역전됐다.
현대·기아차는 지난달 미국시장에서 전년동월 대비 1.6% 증가한 9만4천775대를 판매했다. 이는 미국시장 평균 성장률(6.1%)에 크게 못 미치는 수준이다. 지난달 시장점유율이 올들어 가장 낮은 7.4%로 떨어졌다.
반면 일본차들은 가격경쟁력을 앞세운 공격적인 판촉으로 판매량 확대에 나서고 있다. 지난달 미국시장에서 토요타는 6.9% 늘어난 18만580대를 판매했고, 닛산은 무려 13.3% 급증한 10만3천117대를 팔아치우며 시장 평균성장률을 상회했다.
지난달까지 누적 판매 증가율을 살펴보면 상황은 더 심각하다. 올 1~10월 일본차들의 전년 대비 판매증가율은 닛산(13%), 토요타(6%), 스바루(20%), 마쯔다(8%), 미쓰비시(30%) 등이 모두 시장 평균 증가율(5.5%)을 웃도는 판매증가율을 기록했다. 반면 같은 기간 현대·기아차의 미국시장 판매증가율은 시장 평균에 못 미치는 4%에 그쳤다.
현대차는 엔저에 힘입은 일본차들이 가격을 낮추고, 할인 혜택을 늘리면서 나타난 결과로 분석하고 있다.
◆'고급차판매-제값받기'로 승부…돌파구 될까
현대·가아차는 엔저 등 환율 변동에 따른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등 시장환경이 계속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제값 받기'를 통해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리고, 현지 전략 차종과 주력 모델 등 공격적인 신차 출시를 통해 정면 승부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실제 올 상반기 현대차는 미국 시장에 신형 제네시스와 신형 쏘나타를 출시하면서 가격을 인상하는 강수를 뒀다.
이원희 현대차 재경본부장(사장)은 최근 3분기 경영실적 컨퍼런스콜에서 "엔화 약세로 인한 가격 경쟁력 저하는 가장 큰 리스크 사항"이라고 꼽았다. 다만 그는 "현대차는 고급차 판매를 늘려 부정적인 환율 효과에 맞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제는 엔저 현상이 좀처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현재 100엔당 950원대인 원·엔 환율이 내년 800원대까지 떨어질 것이란 비관적인 전망도 나온다. 업계에서는 엔저 현상에 대해 일본 정부가 당분간 정책기조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업계 관계자는 "내년에는 원·엔 환율이 100엔당 800원 선으로 낮아질 것이라는 예상도 나오고 있다"며 "일본 기업들의 가격인하 공세가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여 대책이 필요하지만 별다른 해법을 찾기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엔저 현상이 본격화 된 지난해 이후 현대차의 실적도 후진하고 있다. 현대차의 올해 3분기까지 연결기준 누적 영업이익은 5조6천743억원에 그쳤다. 전년동기 대비 9.7% 줄어든 규모다.
같은 기간 기아차도 영업이익이 전년동기 대비 18.0% 줄어든 2조720억원을 기록했다. 엔저로 인한 판매부진에다 원화강세(환율하락)가 맞물리면서 원화 환산이익이 줄어든 셈이다.
여기에 현대차는 시가총액 2위의 자리에서 밀려나며 재계 서열 2위의 자존심마저 무너졌다. 전날 유가증권시장에서 현대차는 전 거래일보다 5천원(3.13%) 내린 15만5천원에 거래를 마쳤다. 이로써 시총 규모는 34조1천428억원으로 줄어 SK하이닉스(34조5천437억원)에 밀려 3위로 내려앉았다. 현대차가 시총 3위로 주저 앉은 것은 약 3년 7개월 만이다.
최근 서울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고가 매입 논란과 전날 연비과장 문제로 미국에서 1억달러의 벌금에 합의하는 등 악재에 일본의 양적완화에 따른 엔저 충격 등에 직격탄을 맞은 형국이다. 최근 일본은행의 추가 금융완화 정책으로 엔저 리스크는 재차 부각되고 있다.
캐시카우 역할을 해왔던 안방에서도 수입차들의 공세에 밀려 점유율이 70% 밑으로 내려앉으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현대·기아차는 지난 9월 내수시장 점유율 67.3%를 기록하면서 지난해 12월(66.7%) 이후 9개월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특히 현대차의 내수 점유율이 급감하고 있다. 현대차는 지난 4월 44.6%로 정점을 찍은 후 계속 낮아지다 지난 9월 올 들어 최저치인 37.2%까지 하락했다.
여기에 엔저에 힙입어 한국도요타, 닛산 코리아 등 일본 완성차 브랜드가 최근 국내에 출시하는 신차 가격을 낮게 책정하는 방침을 세우는 등 내수시장 사수에도 적신호가 들어왔다.
업계 관계자는 "엔화 약세로 가격 경쟁력이 높아진 일본 업체들이 공세를 강화하면 내수시장에서 현대차 등 국내 자동차 업체 판매에도 부정적 영향이 미칠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차의 악재는 끝나지 않았다. 현대차 노조가 사측을 상대로 제기한 통상임금 소송 1심 판결이 오는 7일 나온다.
만약 노조와의 통상임금 소송에서 패소하게 되면 현대차에서 5조원, 그룹 전체적으로 13조원가량의 인건비 추가 부담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된다. 산업연구원에 따르면 법원이 노조의 손을 들어줘 통상임금의 범위가 확대될 경우 현대차 영업이익률은 2%p 정도 하락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정기수기자 guyer73@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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