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균성기자]휴대폰 자급제(일명 블랙리스트 제도)가 1일부터 시행됐다. 그러나 이 제도가 뿌리를 내리기 위해서는 앞으로도 상당한 기간이 걸릴 전망이다. 시장에는 관련 단말기가 나와 있지 않고 이 제도를 모르는 사람들도 아직은 많은 편이다.
관련 업체들이 이 제도에 매우 협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제도의 취지는 휴대폰 유통 경쟁을 촉진해 단말기 가격과 서비스 이용료를 내림으로써 가계 통신비를 절감하자는 데 있다. 당연히 관련 기업으로서는 이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기업들이 이 제도를 달가워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다.
◆휴대폰 자급제란 무엇인가
이 제도는 SK텔레콤, KT 등 이동통신 서비스 회사 중심으로 돼 있던 기존의 폐쇄적인 휴대폰 유통 구조를 휴대폰 제조사나 전자제품 양판점 등 다른 유통회사로 개방하자는 게 골자다. 그렇게 하면 유통 경쟁이 촉진되는 건 물론이고 그동안 이동통신 3개사가 단말기와 서비스를 패키지로 묶어 팔면서 발생한 불분명한 가격구조도 개선된다. 서비스와 단말기를 별도로 판매하기 때문에 가격 구조가 투명해지는 것이다.
과거 유통구조에서는 가격이 어떻게 결정되는 지 취재하는 기자도 자세히 알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특히 보조금은 상황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새 제도가 안착되면 이동통신 회사는 오로지 서비스의 품질과 요금만으로 경쟁하게 된다. 소비자는 서비스를 구매할 때 품질과 요금만 따지면 되기 때문에 이동통신 회사로서는 품질을 높이고 요금은 내리는 본원적 경쟁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이런 본원적 경쟁보다 단말기를 이용한 보조금 경쟁이 더 치열했다. 겉으로는 보조금을 통해 소비자에게 혜택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그만큼 요금에 전가할 수밖에 없다. 요금이 적정 수준보다 높은 수준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통신요금 인하 논쟁이 끊임없이 재론된 것도 이런 구조 때문이다.
이 제도가 안착되면 제조회사 또한 단말기 품질과 가격만으로 경쟁하게 된다. 단말기 품질은 올라가고 가격은 내려가는 구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휴대폰 자급제로 이통사가 잃어야 하는 것들
이 제도가 안착되면 이동통신 회사로서는 시장에 대한 통제권이 현저하게 약화될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 기존 이동통신 3사가 시장을 통제하는 두 가지 무기는 3사가 유통시장을 과점한다는 점과 가입자 유치에 절대적 영향력을 갖고 있는 보조금이었다.
휴대폰 자급제는 이 두 가지 무기를 무력화하는 것이다.
서비스를 판매하는 데는 여전히 3사 과점 체제가 유지되겠지만 가입자를 유인하는 힘이 큰 단말기에 대해서는 통제력이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다. 가입자를 유인하는 최대 무기가 단말기 보조금이었는데 단말과 서비스 판매가 분리되면 과거처럼 단말에 보조금을 제공하면서 새로운 가입자를 끌어들이는 정책을 쓰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시장에 대한 통제력 약화와 함께 이윤을 창출하기도 더 어려워진다.
단말기 보조금(일종의 마케팅 비용)이 사라지고 경쟁사별 서비스 수준이 엇비슷하다고 가정하면 사실상 실효적인 가입자 유인책은 요금 인하 밖에 없다. ‘요금 할인’이 아니라 ‘요금 인하’다. ‘요금 할인’은 새 가입자 유치를 통해 추후 보전 받게 되는 일시적 보조금이지만 ‘요금 인하’는 구조적으로 수익을 악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보조금을 쓰지 못해 특별한 경쟁무기를 갖지 못한다면 ‘울며 겨자먹기’로 이 조치도 써야 한다. 문제는 이미 국내 시장이 포화된 상태에다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기도 쉽지 않아 이동통신 회사로서는 좀처럼 취하기 어려운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휴대폰 자급제로 제조사가 잃어야 하는 것들
이동통신 서비스 회사에 비하면 제조사가 잃어야 할 것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얼핏 보면, 얻는 게 더 클 수도 있다. 직접 단말기를 유통할 수 있기 때문에 이동통신 회사 입김으로부터 벗어나 스스로 경쟁력을 더 강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제조사들이 휴대폰 자급제에 적극 동참하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이론과 달리 현실적으로는 과거의 구조가 더 이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제조사들은 무엇보다 시장 위축과 단말기 가격 인하를 우려할 수밖에 없다.
이 제도가 안착되면 일단 통신 과소비가 사라질 가능성이 높다. 보조금이 사라지면 착시현상에 불과한 ‘공짜폰’도 사라지게 된다. 추후 이동통신 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 요금이 얼마 간 인하되겠지만 그 요금인하 수준이 수십 만 원에서 100만원에 육박하는 고가의 단말기를 즉각 구매하도록 유인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소비자는 한 번 구매한 폰을 될 수 있으면 오래 쓰려고 할 것이고 단말기 교체 수요는 제한될 것이다. 예측할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휴대폰 수요가 급격히 위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시장이 위축되면 제조업체로서는 가격 인하 정책을 쓸 수밖에 없다. 특히 보조금 없이 단말기 업체끼리 경쟁하기 때문에 가격 인하는 더 가파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이 되는 것보다는 이통사에 고개 숙이고 이통사를 통해 유통하는 게 더 낫다.
◆휴대폰 자급제 성공하려면 제3의 세력이 필요하지만…
결과적으로 이통통신 서비스 회사나 제조사 모두 이 제도를 별로 반길 이유가 없다. 정부로서는 가계 통신비 인하를 위해 유통구조를 크게 바꾸려 하지만 기존 제도에 의한 기득권이 워낙 크기 때문에 서비스 회사나 제조사는 소극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
이들 업체는 심지어 이 제도가 활성화하는 데 저항하는 쪽으로 나올 가능성이 더 높다.
소비자 또한 우선 먹기에 달콤한 보조금 유혹을 뿌리치기는 힘들 것이다.
제3의 유통 세력들이 아직까지 휴대폰 자급제에 적극 가세하지 않는 이유 또한 보조금 융단폭격에 맞서 자급제 시장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 때문에 앞으로도 상당 기간 동안 이 제도는 시장에서 겉돌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정부가 진심으로 이 제도를 안착시키려면 더 적극적으로 후속 대책을 내놓아야 한다. 무엇보다 기득권에 맞서 강력한 제3의 유통 세력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들은 기득권이 없기 때문에 새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무기로 전투를 벌일 수 있다.
서비스 쪽에서는 이동통신재판매사업자(MVNO)를 키울 수 있는 더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고 단말 쪽에서는 중국 등으로부터 중저가 제품의 수입을 장려하는 정책까지 고려해야 한다.
또 제도가 허락하는 한에서 보조금에 대한 관리도 더 철저히 해야 한다.
이균성 기자 gslee@inews24.com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