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경제가 특허 전쟁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주요 나라들은 국가 차원에서 특허 전략을 마련하는 등 '특허 전쟁'시대에 발빠르게 대비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아직 이렇다 할 특허 전략을 수립하지 않고 있어 글로벌 경제 시대에 한 발 뒤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이뉴스24는 '특허, 국가적 아젠다가 필요하다'는 기획시리즈를 통해 한국 특허 전략의 현황과 문제점, 그리고 대안을 집중 점검한다. <편집자 주>
바야흐로 글로벌 경제는 '지식재산 전쟁' 시대에 접어들고 있다. 수 십년 동안 건재해왔던 다국적 기업이 특허 하나 때문에 휘청거리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국제 경제생태계에선 특허 소송만으로 먹고 사는 '특허괴물(patent Troll)'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인텔, 마이크로소프트(MS), 소니, 애플, 구글, 이베이 등 글로벌 기업들은 '특허괴물'들과 지분으로 '혈연관계'를 맺으면서 혹시 모를 위협에 대응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 일본 등 오랜 지적재산의 역사를 가진 나라들은 이미 국가적인 특허전략을 세워 자국기업을 보호하는 한편, 다른 나라 경쟁기업들에 '보이지 않는 장벽'을 치고 있다. 자유무역협정(FTA)과 국가·지역별 연합이 확대되는 가운데, 지적재산 보호를 위한 국가 전략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부각되고 있다.
한국은 양적인 부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특허강국'으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한 거풀만 벗겨보면 이 같은 위상이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실제로는 한 해 수조원대 기술료를 해외에 쏟아 붓고 있는 '부실강국'인 것이다. '정보기술(IT) 코리아'의 위상은 허약한 체질 때문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기에 놓여 있는 것이다.
◆'부실한 특허강국' 대한민국
우리나라는 지난해 국제특허협력조약(PCT) 기준 세계 특허 출원 건수에서 프랑스와 영국을 제치고 4위로 올라섰다. 미국 특허출원 역시 4위에 랭크됐으며 연구개발(R&D) 비용은 세계 7위, 국내총생산(GDP) 대비 R&D 비중은 5위권에 포진해있다.
그러나 특허료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기술무역수지 면에선 부실 정도가 심각하다. 지난 2003년 24억 달러 적자를 본 데 이어 2004년 27억달러, 2005년 29억달러로 그 규모가 계속 늘어나는 추세다.
이런 상황은 개별기업으로 눈을 돌려도 크게 다르지 않다. 특허 수 면에서 IBM과 함께 세계 1위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국내 최대기업 삼성전자 역시 특허수지 적자가 매년 늘어나고 있다. 회사 관계자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특허수지 적자는 오는 2010년까지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2015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특허수지 적자를 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연도별 기술무역 추이(단위:100만 달러, %) 구분 | 기술수출(A) | 기술도입(B) | 기술무역수지(A-B) |
2001년 | 619.1 | 2,642.7 | -2,023.6 |
2002년 | 638.1 | 2,721.5 | -2,083.3 |
2003년 | 816.2 | 3,236.5 | -2,420.3 |
2004년 | 1,416.4 | 4,147.5 | -2,731.1 |
2005년 | 1624.9 | 4525.1 | -2,900.2 |
지적재산권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찍이 국가적인 대응에 나선 나라들의 기업들과 비교해 국내기업들은 핵심 기반기술, 돈이 될만한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원천·수익특허 면에서 열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국가적인 특허전략이 없다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이 국가 과학경쟁력 지수 중 지재권의 보호 정도를 집계한 결과, 한국은 지난해 기준 세계 44위에 머물렀다. 이러한 현실을 타개할 국가적 전략과 전술의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가까운 나라 일본에선 지난 2002년 2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가 나서 지식재산 보호를 강화하겠다고 천명한 이후, 이듬해 총리 산하 지식재산전략본부를 설치해 공격적인 대응에 나섰다. 일본은 이에 앞서 이미 1990년부터 적극적인 특허전략을 구사하면서 지난 2002년 특허사용료 수지 흑자를 달성했다. 지난해 일본의 특허수지는 흑자는 5천500억엔에 달했다.
◆미천한 특허역사 극복할 '묘책' 절실
미국은 지난 1980년대부터 원천기술 확보를 강조하는 지재권 전략을 폈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에 통상압력을 행사하는 한편, 특허 관련 수익을 확대하기 위해 애썼다. 이어 일본은 원천기술 열세를 방어하기 위해 다양한 응용기술을 개발하고, 지재권에 대한 강력한 보호체계를 갖추는데 주력했다.
이후 일본은 특허소송을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해 우리나라와 대만 등지의 기업들을 압박해왔다. 한국은 반도체와 액정표시장치(LCD) 등 분야에 일본보다 늦게 진출해 시장을 석권하는 뒷심을 발휘했지만, 부품·소재 상당 부분을 의존하면서 기술료를 내주거나 특허분쟁에 시달리는 상황이다.
미국이나 일본, 유럽 특허강국들의 지적재산 관련 역사의 시작은 우리보다 훨씬 앞서 1600~17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지난 1624년 최초의 특허법을 제정했고, 미국은 1776년 각 주별로 특허법을 만들어 시행했다. 일본은 1871년 처음으로 특허제도를 공포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각 나라가 자국기업에 유리하도록 법과 제도를 강화해 온 것은 물론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1908년 특허령을 공포한 후, 해방 뒤인 1946년 특허원을 창립하고 특허법을 제정하면서 지재권 관련 움직임을 본격화했다. 정부조직법을 개정하고 특허청 직제령을 제정해 현재의 특허청이 문을 열게 된 것은 1977년에 이르러서다.
우리나라 특허청은 지난해 중앙행정기관 중 처음으로 기업형 책임운영기관으로 거듭나기까지 혁신을 지속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특허심사 처리기간(9.8개월)을 달성하는 등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선진국들처럼 지적재산 강화를 위해 한 나라의 역량을 집결하는 체제나 전략을 갖추는데 있어선 여전히 미흡한 상태다.
지난 4월 창립 40주년을 맞은 한국IBM은 우리나라에 대해 보고서를 내고 "한국이 현재와 같이 선진국을 따라가는 '모방자' 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경우, 원천기술로 무장한 미국과 일본을 뛰어넘지 못한 채 후발주자들에 추격을 허용할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IBM은 최근 9년 연속 2천건 이상 특허를 획득하는가 하면, 14년 연속 특허보유 세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특허강자'다.
◇특허제도의 기원 및 우리나라 특허제도 연혁
특허제도 기원 | |
1300년대 | 14세기 영국에서 국왕은 새로운 기술에 대해 '개봉된 문서(Letters Patent)'라는 의미의 증서를 수여함. 이후 '열린(Open)'이란 뜻을 가진 'Patent'를 특허권이란 의미로 사용. |
1474년 | 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베니스에서 모직물 공업의 발전을 위해 법을 제정해 제도적으로 발명을 보호. 이를 세계 최초의 특허법으로 분류. |
1624년 | 영국에서 선발명주의와 함께 14년의 독점권을 부여하는 전매조례(Statute of Monopolies) 제정. 현대 특허법의 모태. |
우리나라 특허제도의 주요 연혁 | |
1908년 | 특허령 공포 |
1946년 | 특허원 창립 및 특허법 제정 |
1949년 | 상공부 내 특허국 신설 |
1961년 | 특허법을 산업재산권 4법으로 분리 |
1977년 | 특허청 개청 |
1979년 | 세계지적소유권기구(WIPO) 가입 |
1984년 | 특허협력조약(Patent Cooperation Treaty) 가입 |
2004년 | 특허청 혁신업무 전담기구 설치 |
2006년 | 특허청 중앙행정기관 최초로 기업형 중앙책임운영기관 전환 |
◆국가 특허전략 수립, '알맹이' 없이 표류
현재 국회에선 김영선 의원(한나라당)과 정성호 의원(열린우리당), 이병석 의원(한나라당)이 각각 개별 발의한 3개 지식재산 관련 법안이 계류돼 있다. 각 법안의 밑바탕은 국가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과학·기술·예술·문화 등 영역에서 기술 및 작품의 창조와 보호, 육성이 이뤄지도록 국가전략을 수립하자는 측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정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가 지식재산 전략의 수립은 본질을 벗어난 논란으로 표류하는 모습이다. 통신이냐, 방송이냐는 규정을 놓고 4년째 갈팡질팡하고 있는 인터넷 프로토콜 TV(IPTV) 정책처럼 시간만 흘려보내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지난 2005~2006년 발의된 3개 법안은 국가가 지식재산 관련 정책을 일관되게 수립·실행할 수 있도록 '지식재산처' '지식재산부'를 신설하거나, 대통령 직속의 '국가지식재산위원회'를 두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산업·예술 측면에서 각기 다른 전문성을 요하는 지식재산 업무를 통합하는 것이 옳은지, 새로운 부서를 만들기 위해 정부조직법을 바꿔야 하는 것인지 등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선 앞서 발의된 법안들이 지난 2002년 일본에서 제정된 '지적재산기본법'을 그대로 베껴, 국내의 특수한 여건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고 있다.
국내 한 대기업의 특허전략 담당 임원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특허강국이나 한류현상을 운운하며 국가 지적재산 전략의 A, B, C를 따지는 모습은 국내 기업들이 해외 '특허강자'들을 따라잡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런가 하면 국가과학기술위원회(위원장 대통령)는 범부처 차원의 '지식재산전략체계'를 구축해, 5대 전략을 중심으로 세부과제들을 추진하고 있다. 각 전략과제들은 기본적인 지적재산 역량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사항들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이제 정부 부처가 모여 세부과제를 진행하는 초기단계로, 정부와 민간의 역량을 결집해 해외의 '특허장벽'에 대항할 수 있는 범 국가 차원의 지적재산 전략을 세우는 데는 한계가 있는 상황이다.
최근 미국 정부는 중국 기업이 하드디스크 드라이브(HDD) 세계 1위업체 씨게이트테크놀로지 인수를 추진하면서 긴장하는 모습이다. HDD가 수출통제 품목은 아니지만, 세계 1위 기술력과 보안 관련 기술이 유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통제를 할 움직임이다.
중국기업의 온라인 게임업체 액토즈소프트 인수나, 액정표시장치(LCD) 업체 하이디스 인수 당시 산업기술 유출 건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한 우리나라와 대조를 이룬다. 온라인 게임이나 LCD 산업 모두 우리나라가 세계 1위를 달리고 있지만, 중국·대만 등 경쟁국가의 맹렬한 추격에 고삐를 늦출 수 없는 상태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불과 며칠 전에야 40개의 국가핵심기술을 지정하고, 수출통제에 나섰다.
국제사회에서 기업들 간 기술싸움이 '특허전쟁'으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시급한 것은, 우리나라의 현재 위치를 고려한 지적재산 전략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그에 따른 전략과 세부 전술을 수립·실행하는 일이라는 게 산업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관련된 일을 어느 부서에서 할 것인지, 해외의 앞선 나라들을 벤치마킹할 것인지, 독자적인 정책을 수립할 것인지 여부는 국가 차원의 전략과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지만 소모적인 논쟁으로 시간을 허비할 사안은 아닌 것으로 지적된다.
권해주기자 postman@inews24.com 이설영기자 ronia@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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