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정종오 기자] 33년을 기다렸다. 고도(高度)를.
지난 7일 서울 강북구 삼양동과 우이동 일대를 찾았다. 우이신설선을 타고 삼양역에서 내리자 길 건너편에 ‘미아3구역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이란 글씨가 대문짝만하게 쓰여 있었다. 층층이 올라간 높은 건물이 한창 공사 중이었다.
맞은 편 골목으로 들어서자 낮은 단독주택들이 얽히고 설켜 있었다. 좁은 골목길은 미로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처음 찾는 낯선 이들에게는 자칫 길을 잘못 들어서면 꼼짝없이 헤맬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좁은 골목길뿐 아니라 근처의 3층 건물에서 내려다 본 삼양동은 낮고, 미로 같은 골목에, 다닥다닥 붙어있는 집들이 많았다.
삼양역을 뒤로 하고 북한산우이역에 내려서자마자 저 멀리 북한산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대한 바위가 압도적이면서도 시원하게 시야를 가득 채웠다. 높은 건물이 많지 않아 북한산을 바라보는 풍경은 시원했다. 이와 함께 눈에 띄는 플래카드 하나가 걸려 있었다.
“해냈습니다! 북한산 고도제한 완화”
특정 정당 국회의원이 자신의 사진을 크게 하고 내건 플래카드였다. 강북구민들은 지금 33년 동안 적용됐던 고도 제한이 풀릴 것 같아 기대감에 부풀어 있다. 1990년부터 고도제한에 묶여 제대로 발전할 수 없었다는 ‘한(恨)’은 풀었는데 그 기대감이 구민들 모두에게 행복한 현실로 다가올 수 있을까.
서울시는 최근 고도지구를 전면 개편하는 구상안을 내놓았다. 고도지구는 도시경관 보호와 과밀방지를 위해 건축물 높이의 최고한도를 정하는 도시관리계획이다. 고도지구를 일률적 규제에서 앞으로 시민이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 관리로 전환하기로 한 것이다. 쉽게 말해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거다.
서울시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신(新) 고도지구 구상(안)’을 마련해 지난 6일부터 열람공고를 실시했다. 의견 수렴에 나섰다.
이번 고도지구 구상안 중 규모가 가장 큰 곳은 ‘북한산 주변 고도지구’이다. 1990년 고도지구 지정 이후 33년 동안 정비사업이 관련 규제로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게 강북구청의 해석이다. 주거 정비사업이 정체돼 환경 개선의 큰 장애물로 작용했다는 판단이다.
북한산 주변 고도지구는 경관 보호를 위해 1990년 12월 지정됐다. 총면적은 약 3.56㎢이다. 이 중 67%인 2.39㎢는 강북구에 있다. 강북구 노후건축물 비율이 약 66%에 이르는 배경 중 하나이다. 서울시 노후건축물 전체 비율(약 49%)보다 높아 주거환경 개선이 시급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울시는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제2종 일반주거지역은 현 고도제한(20m)을 28m까지 완화할 것으로 보인다. 주거환경 개선을 위한 정비사업을 할 때는 최대 15층(45m)까지 추가로 완화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난개발 등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서울시는 북한산 경관 보호를 위해 경관관리 가이드라인을 준수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구체적 가이드라인은 도시계획 관련 위원회의 심의 등을 거쳐 결정한다.
강북구민들의 33년 염원과 현 실태를 직접 보여주기 위해 지난달 30일 오전 11시 북한산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덕성여대 차미리사기념관 옥상에서 현장 설명회가 있었다. 이날은 ‘폭염주의보’가 발령됐던 시간이었다.
후텁지근하고 강렬한 태양빛이 내리쬐는 가운데 옥상에는 강북구민, 구의원, 구청장, 기자 등 등 많은 이들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에는 오세훈 서울시장을 비롯해 이순희 강북구청장도 함께 했다.
이순희 강북구청장은 “고도제한 구민숙원사업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한(恨)’이 풀렸다”며 “앞으로 재개발재건축 사업에 속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현장 설명회에서 오세훈 시장은 “이번 조치는 경관 보호의 가치를 그대로 유지하는 한도 내에서 그동안 지나치게 고도 제한이 이뤄져 재산상의 불이익을 받았던 시민들의 불이익을 해소시키는 차원”이라며 “내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주거환경이 정비되면서 재산상의 불이익을 받던 강북 지역의 주민 여러분들이 더는 불이익을 받지 않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도 제한 규제가 완화되면서 강북구는 지금 생기를 되찾고 있다. 다만 이제 시작점에 있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진행 과정에서 여럿 변수도 존재한다.
김용학 서울시 도시계획과장은 “오는 20일까지 관련 구상안에 대해 열람이 가능하다”며 “이 기간 동안 여러 의견이 접수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옥현 강북구청 도시관리국장은 “북한산의 고도가 약 835m쯤으로 알고 있다”며 “이번에 완화될 것으로 보이는 45m(최대 15층)는 사람으로 치자면 발목쯤에 해당하는 높이”라고 설명했다. 크게 북한산 자연경관을 훼손하지는 않을 것이란 점을 강조한 설명이다.
자연 경관도 살리면서 그동안 고도 제한으로 여러 불편했던 강북구민 주거 개선에 나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유 국장은 “신 고도지구 구상안이 절차를 거쳐 결정되면 주민들이 의견을 모아 재개발 등 구체적 안을 제안할 것”이라며 “구청으로서는 구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행정 절차에 문제가 없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구상안은 이번 달 20일까지 열람 기간이다. 접수된 의견을 검토, 반영할 예정이다. 이어 시의회 의견 청취, 전략환경영향평가,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심의를 거친다. 서울시는 올해 연말까지 고도지구 개편을 완료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순희 강북구청장은 더불어민주당 부대변인, 제20대 대통령선거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대한민국대전환선거대책위원회 여성위원회 상황실장 등을 거쳐 ‘4수’ 끝에 지난해 강북구청장에 당선됐다.
고도 제한 완화에 따라 북한산의 자연 경관 보존과 열악한 주거환경 개선의 이해 충돌 사이에서 이를 어떻게, 얼마나 현명하게 해결하느냐가 앞으로 구민들의 지지를 이끄는 하나의 잣대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재개발·재건축 사업은 특히 여럿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이를 어떻게 풀어 갈 것인지도 숙제로 남았다.
/정종오 기자(ikokid@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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