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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제2이통사 경쟁율 6:1…겨울부터 뜨거웠다 [김문기의 아이씨테크]


[다시 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제2이동통신사 大戰편

[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1992년 4월 14일.

체신부가 제2이동통신사업자의 신규허가 신청공고를 냈다. 신청서는 6월말까지 접수하고 8월말까지 사업자 선정을 마무리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날 공고가 나오긴 했으나 1980년말부터 통신시장 경쟁체제 도입이 논의됐으며, 1990년 체신부가 통신사업 구조조정안을 발표했기에 사실상 대기업들의 치열한 눈치싸움은 물밑에서 계속돼왔다. 시장에서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 참여 기업들이 대체적으로 드러나 있는 상태였다. 준비과정도 만만치 않았기에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실정이었다.

제2이동통신사업자 공모 대상으로는 초기 선경과 포항제철, 효성, 쌍용, 대한항공, 일진, 맥슨전자, 코오롱, 태일전자 등 8개 업체가 조사 준비팀을 구성하는 등 구체적 움직임을 보였으나 이후 선경과 포항제철, 쌍용, 코오롱, 동부, 동양 등 6개 그룹 경쟁으로 압축됐다.

이렇듯 대기업들이 이동통신 사업에 뛰어 들고자 했던 이유는 1991년 이동전화 가입자수 15만명에서 2000년 450만명으로 늘어남에 따라 시장규모가 700억원 수준에서 2조원 선으로 급증할 전망이었기 때문이다. 무선호출 시장까지 합산한다면 무려 3조원 시장으로 불어난다. 이동통신 사업을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불렸던 근거이기도 했다.

다만, 이동통신 사업은 장치산업이라는 특성상 막대한 투자비가 필요하다. 당시 10년간 1조원이라는 거금을 투입해야만 하는 실정이었다. 고로 대기업 이외에 이동통신 사업 진출은 근본적으로 어려웠다.

사진 역사 [사진=SK텔레콤]
사진 역사 [사진=SK텔레콤]

◆ 6대 그룹 눈치전…선경의 질주

6개 그룹은 440개사에 달하는 국내업체 및 외국 통신사업체와 컨소시엄을 구성해 체신부 제안요청서(RFP)에 준하는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했다.

선경그룹은 1990년 하반기 선경정보시스템을 설립한 후 1991년 이를 기반으로한 선경텔레콤을 발족하면서 후발기업으로서는 정보통신사업에 가장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 막대한 자금력을 앞세운 포항제철은 계알사인 포스데이타를 통해 정보통신사업 확대에 골몰했다. 코오롱그룹 역시 1990년 하반기 코오롱정보통신을 설립했으며 동부그룹은 산하 정보통신본부를 동부정보통신으로 독립시키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동양그룹 역시 1991년 3월 동양정보통신을 설립해 자체 전산망통합운영사업을 전개했다.

제2이동통신사업자 신규허가 신청공고를 시작으로 6개 그룹은 대대적인 홍보전에 돌입했다. 각자 이동통신 사업 진출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하고 최적의 후보임을 강조했다.

이 중 가장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 곳은 선경그룹이다. 1992년 1월 최종현 선경그룹 회장은 신년사를 통해 정보통신사업 진출 원년으로 삼고 진출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다.

그는 “기존 업체와의 불필요한 경쟁을 피하고 국가 산업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우선적으로 생각했고, 또한 급속히 진전되고 있는 글로벌리제이션 시대에서의 성장 가능성도 고려했다”라며, “이런 분야 등 중 정보통신사업을 다음 사업영역으로 선정해 그룹의 중점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또한 “우리가 진출하고자 하는 이러한 정보통신사업은 KMS와 SUPEX를 추구하는 선경으로서는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업영역이라고 확신했다”고 강조했다.

선경그룹은 별도 회사로 대한텔레콤을 설립하고 컨소시엄명으로 확정했다. 선경텔레콤과 유공해운을 겸임하고 있는 손길승 SK그룹경영기획실장을 총괄로 임명했다.

선경그룹은 컨소시엄 구성에도 힘을 쏟았다. 사업자 선정을 위해서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기업을 끌어들이는게 관건이었다. 지분제한으로 인해 나설 수 없었던 삼성과 럭키금성, 대우, 현대 등 4대 재벌기업의 향방과 정부투자기관인 한국전력이 유력한 우군으로 불렸다.

선경은 이 중 한국전력과 손을 잡았다. 정부기관임과 동시에 막대한 자금력과 전국 광전송망을 갖추고 있어 선정결과에 긍정적 영향을 끼칠 공산이 컸다. 럭키금성의 경우 부산투자금융을 통해 선경에 합류했다.

우리나라는 이동통신 기술이 낙후돼 있었기에 외국 기술기업과의 협력 역시 중요한 선택의 근거로 작용했다. 선경은 앞서 미국 벨 사우스와 협력관계를 유지했으나 불화가 지속됨에 따라 1991년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미국 GTE와 영국 보다폰, 홍콩 허치슨이 컨소시엄에 합류하게 됐다.

◆ 유력 후보 '포철'로 모인다…코오롱·동부·동양·쌍용 '수싸움'

포항제철은 계열사인 포스데이타를 중심으로 이동통신 사업에 전력투구했다. 총괄 역시 포스데이타를 이끌고 있는 성기중 사장이 지휘봉을 잡았다. 이후 신세기통신으로 컨소시엄을 완성하면서 대표로 통신전문가인 외부 인사 권혁조 대표를 영입했다.

포항제철 역시 선경그룹과 마찬가지로 유력한 선정후보였기에 당시 쟁쟁한 기업들이 속속 컨소시엄에 합류했다. 특히 4대 재벌기업 중 럭키금성을 제외한 삼성과 대우, 현대가 모두 포철에 모였다. 삼성은 삼성전관을, 대우는 대우통신, 현대는 현대상선을 통해 합류했다.

글로벌 협력업체도 탄탄했다. 미국 팩텔과 퀄컴뿐만 아니라 독일의 만네스만이 나섰다. 이 중 퀄컴은 나중에 코드분할다중방식(CDMA)의 디지털 이동통신을 개발해 국내 최초 상용화를 이끈 기업으로 기록됐다.

코오롱의 브레인은 이웅열 부회장으로 알려졌다. 이동찬 그룹회장의 외아들로 3세 경영 안착을 위한 이동통신 사업 진출이라는 미션이 부여된 셈이다. 동아제약, 부산파이프뿐만 아니라 미국 나이넥스와 손을 잡았다. 당시 이웅영 부회장이 17층에서 근무하고 있어 이동통신 사업을 ‘17층 프로젝트'라 부르기도 했다.

동부그룹은 김준기 그룹회장 경기고 동문 오효원 전무가 지휘봉을 잡았다. 한국도로공사와 미국 벨 애틀란틱이 합류했다. 동부증권과 동부애트나생명보험, 동부상호신용금고, 동부창업투자, 동부고속 등 금융과 보험, 운송 서비스 노하우를 통해 이동통신에서도 양질의 서비스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쌍용그룹은 미래이동통신을 세우고 김석원 회장의 동생인 김석준 부회장이 키를 잡았다. 미국 사우스 웨스턴 벨과 스웨덴의 스웨디시텔레콤이 협력했다.

쌍용은 쌍용컴퓨터와 쌍용양회 등의 이동통신팀과 그룹종합조정실 신규사업팀이 통합돼 이동통신사업본부를 구성하면서 일찌감치 컨소시엄 구성을 마무리했다. 이를 통해 미래이동통신이라는 명칭도 확정됐다.

동양은 동양이동통신을 통해 중소기업도 이동통신에 진출할 수 있다는 목표 아래 컨소시엄을 키웠다. 무려 306개사가 함께했다. 동양의 경우 앞서 이동통신사업부를 신설하고 안상수 동양선물 사장을 임명했다. 앞서 1991년 11월 미국 US웨스트가 기술기업으로 합류했다.

동양은 앞선 5개 컨소시엄과 다르게 투명성을 강조했다. 중소기업 집합으로 규모 면에서는 부족할 수 있으나 이를 지분에 따른 혈맹관계로 구성하면서 누구보다 끈끈함을 강조했다.

체신부, 2이동통신사 컨소시엄 현황 [사진=참고자료=체신부]
체신부, 2이동통신사 컨소시엄 현황 [사진=참고자료=체신부]

◆ 식지 않는 경쟁과열 속 날 밝아

6개 그룹은 치열한 홍보전과 마케팅, 물밑에서는 수주전을 벌이면서 과열경쟁양상을 보였다. 이에 따라 관련 시장 역시도 유력한 후보 잡기에 혈안이 됐다.

이같은 움직임은 해외 사업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해외 통신장비업체들의 판촉전도 치열하게 전개됐다. 미국 AT&T와 모토로라, 스웨덴 에릭슨 등이 각축전을 벌였다. 본사 회장단과 영향력 있는 인사들이 동원돼 각 그룹에 로비전을 벌였다. 또한 각 컨소시엄에 참여하고 있는 해외 기술업체들과 장비 구매 협조를 약속받기도 했다.

이들은 6개 그룹을 만나 아날로그와 디지털 방식 교환시스템과 기지국 장비를 소개하는 한편, 장비 구체적 사양과 견적서까지 뽑아 제출했다. 체신부에 제출해야 하는 사업계획서에는 장비구매계획도 포함돼야 했기에 컨소시엄 공략은 필수 관문이었다.

한편으로는 평가 점수를 유리하게 받을 수 있는 국산장비에 대한 수급 계획도 불거졌다. 삼성과 금성 등도 구매 제안에 나선다. 국산장비의 경우 전원공급장치와 안테나 등 일부 장비들이 채택된 것으로 알려졌다.

각 그룹의 회장까지 발벗고 나섬에 따라 과열양상은 하루가 다르게 심화됐다. 일각에서는 6개 그룹을 모두 통합하는 ‘연합컨소시엄’까지 논의해봐야 한다고 강조했지만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상태였다.

이에 따라 5월 30일 6개 그룹의 사장과 부사장급 이동통신 관련 본부장들이 뉴서울골프장에 모여 골프 회동을 벌이는 상황도 연출됐다. 과열 분위기를 식히고 공정한 경쟁에 나서자는게 회동의 취지였다.

제2이동통신사업자 공모 접수를 보름 정도 앞둔 6월 10일 체신부는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세부 계획을 밝혔다. 6월 25일까지 세부심사 평가기준을 확정하고 각계 전문가 55명으로 심사평가전담반을 구성키로 했다. 이동전화는 26일부터 접수에 돌입해, 1차 심사는 7월 13~28일까지, 2차 심사는 8월 3~22일가지 진행키로 했다. 통신위원회 심의를 거쳐 8월말 최종 1개 사업자를 선정하기로 했다. 심사는 비공개 장소에서 합숙심사를 계획했다.

이후 1992년 6월 26일 한번도 찾아 볼 수 없는 진풍경 속에 6개 컨소시엄이 제2이동통신사업자 공모 접수에 나섰다.

▲ 다시쓰는 이동통신 연대기

1부. 삐삐·카폰…이동통신을 깨우다

① '삐삐' 무선호출기(上)…청약 가입했던 시절② '삐삐' 무선호출기(中)…‘삐삐인생' 그래도 좋다③ '삐삐' 무선호출기(下)…’012 vs 015’ 경합과 몰락 ④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上)…"나, 이런 사람이야!"⑤ ‘카폰’ 자동차다이얼전화(下)…’쌍안테나' 역사 속으로

2부. 1세대 통신(1G)…삼통사 라이즈

⑥ 삼통사 비긴즈⑦ 삼통사 경쟁의 서막⑧ 이동전화 첫 상용화, ‘호돌이’의 추억➈ 이동통신 100만 가입자 시대 열렸다⑩ 100년 통신독점 깨지다…'한국통신 vs 데이콤’

3부. 제2이동통신사 大戰

⑪ 제2이통사 大戰 발발…시련의 연속 체신부
/김문기 기자(mo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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