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
지난해 10월 말 별세한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한 호텔에서 임원 200여 명을 모아 놓고 쓴소리를 내뱉었다. 당시 취임 5년째이던 이 회장이 후쿠다 다미오 고문에게 삼성 제품이 미국 시장에서 홀대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 받은 후였다.
이 회장은 임직원들을 향해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되고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다"며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고 말하며 기업 성장을 위한 개혁을 요구했다.
하지만 임직원들은 당시 이 회장이 이 같이 나선 것을 두고 과하다고 생각했다. 이미 삼성이 국내 대표 대기업으로 성장 가도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큰 변화보다는 현 상태를 유지하려는 이들이 더 많았다.
이후 이 회장은 칼을 빼들었다. 지난 1995년 3월 9일 경북 구미 공장 앞에서 벌어졌던 '애니콜 화형식'이 대표적이다. 이 회장은 애니콜의 불량률이 12%에 달하자 15만 대의 애니콜을 모두 불태웠다. 이 때 충격을 받은 임직원들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양적 성장에만 매몰돼 있다는 지적을 받았던 삼성은 질적 성장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결국 1997년 외환위기를 잘 이겨낸 후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재용 부재 위기 속 차분한 삼성…'신경영 선언' 행사 없어
이처럼 반도체·스마트폰을 앞세운 삼성의 성장은 이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 밑바탕이 됐다. 그러나 글로벌 초일류 기업이 된 삼성전자의 분위기는 침울하다. 이 회장이 지난해 별세한 데다 총수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현재 수감 중인 상태에서 해외 경쟁 업체들의 공세까지 겹쳤기 때문이다.
이에 '신경영 선언' 28주년을 맞은 7일 삼성전자 등 주요 계열사들은 별도 행사 없이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다. 삼성은 매년 신경영 선언을 되새기기 위해 6월 7일을 기념일로 챙겨왔으나, 이 회장이 지난 2014년에 쓰러진 후 대규모 행사 없이 사내 방송 등을 통해 신경영을 기념했다. 하지만 이 부회장과 핵심 경영진이 국정농단 사건 등에 연루돼 각종 수사·재판을 받기 시작한 지난 2017년부터는 이 마저도 사라졌다.
특히 올해 분위기는 더 위축된 모습이다. 이 부회장이 올 초 국정농단 사건으로 재수감됐기 때문이다. 이 부회장은 지난 2018년 2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된 이후 이 회장의 '신경영 정신'을 계승한 '뉴 삼성' 비전을 밝히며 '이재용 체제'를 위한 리더십을 다지려고 했으나 재수감되며 물거품이 됐다.
삼성 역시 총수 부재 영향으로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했지만 대규모 투자 등에서 차질을 빚으며 미래 먹거리 준비에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여기에 미국, 중국을 중심으로 반도체 패권 경쟁이 격화되며 각국 기업들이 투자에 속도를 높이고 있지만 삼성은 구체적인 투자 계획을 제대로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특히 파운드리 시장에서 대만 TSMC와 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는 점에선 업계에서도 안타까워 하는 분위기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삼성전자의 시장점유율은 17%로 TSMC(55%)에 38%포인트 차로 뒤졌다. 두 업체간 점유율 격차는 지난해 4분기 36%포인트차보다 더 커졌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이 총수 부재 상황 속에 이전 미래전략실 같은 그룹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만한 조직이 딱히 없어 미래 성장 동력을 찾는데 어려움을 겪는 듯 하다"며 "사업지원 TF가 있긴 하지만 기획이나 인사 업무를 주로 수행하는 만큼, 그룹 전체 분위기를 이끌 만한 핵심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 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패권 전쟁 속 '사면론' 확산…이재용 '산 넘어 산'
이에 사회 각 계에선 전 세계 반도체 패권 전쟁이 치열해진 상황에서 우리나라가 제대로 대응하기 위해 이 부회장의 사면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주장을 올해 4월부터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이를 두고 청와대는 지난달 초까지 선을 그으며 완강한 입장을 보였지만, 지난달 10일 취임 4주년 특별연설 때를 기점으로 문 대통령의 태도에도 점차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 재계의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최근 문 대통령이 4대 그룹 총수들과 가진 첫 회동 자리에서 이 부회장의 사면과 관련해 "국민들도 공감하는 분이 많다"고 언급하면서 사면 가능성은 더 커지고 있다. 이 자리에 참석한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도 "반도체는 대형 투자 결정이 필요한 데 총수가 있어야 의사결정이 신속하다"고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이 같은 분위기 속에 재계에선 오는 8월 광복절 특사를 통한 사면이나 가석방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현재까지 전체 형기의 60% 정도를 복역해 가석방도 가능하지만, 재계에선 사면에 더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다만 이 부회장이 풀려난다고 해도 재판이 종료된 국정농단 사건에 한해서 형 집행을 면제 받게 되는 것으로, 사면이 된다고 해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재판이 이어지고 있어 이 부회장과 삼성의 앞길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재계 관계자는 "투자 규모와 시기가 매우 중요한 반도체의 경우 정확한 판단으로 신속한 의사 결정을 할 수 있는 총수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매우 클 수밖에 없다"며 "이 부회장이 지난 2016년 말부터 국정농단 관련 수사를 받아온 점을 감안하면 햇수로 6년째 수사와 재판에 시달리며 경영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삼성과 한국 경제 측면에서도 굉장한 손실"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부회장이 사면된다해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재판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경영 활동은 앞으로 최소 3~4년간 정상적으로 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이 회장 체제의 '신경영 정신'을 이어 '뉴 삼성' 비전을 실현하려던 이 부회장의 계획이 사법 리스크로 모두 틀어지면서 삼성 내부의 위기 의식은 갈수록 더 커지는 분위기"라고 덧붙였다.
/장유미 기자(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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