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현석 기자] '100년 기업' 삼양그룹의 초석을 다진 김상하 삼양그룹 명예회장이 20일 별세했다. 향년 95세.
고인은 삼양그룹 창업주 수당 김연수 선생의 7남 6녀 중 5남으로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후 1948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삼양사에 입사했으며, 산업보국을 근간으로 성실과 중용의 자세로 72년간 경영 현장을 누비며 우리나라 사회 전반의 발전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 제당·화섬 사업 등 진출하며 기술개발·인재육성 전력
김 명예회장은 삼양그룹을 이끄는 동안 제당, 화섬 사업 등에 연이어 진출하며 그룹의 기틀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기술개발과 인재 육성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고인은 생전 출간된 회고록에서 "사업이란 제조업을 통해 사업보국을 실현해야 하며, 기술개발과 인재 육성에 힘써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기업의 영속성이 위험해지고, 자칫하면 국가 경제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고 밝혔다.
이 같은 생각에 따라 그는 평생 경영을 통해 국민 의식주 발전과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또 '분수를 지켜 복을 기르고, 마음을 너그럽게 하며 욕망을 절제해 기를 기르고, 낭비를 삼가 재를 기른다'는 삼양훈에 따라 과욕을 경계하고 국가와 사회에 묵묵히 헌신하는 길을 걸었다.
실제 김 명예회장은 생전 대한상공회의소장, 대한농구협회장, 제2의 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등 100여 개의 단체를 이끌며 경제·체육·환경·문화 등 사회 전반의 발전에 헌신했다. 특히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은 1988년 취임 이후 12년간 재임해 역대 최장수 회장으로 기록됐고, 대한농구협회장도 1985년부터 12년간 맡아 한국 농구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이 같은 공로는 수많은 수상으로 입증됐다. 김 명예회장은 1975년 동탑산업훈장에 서훈된 데 이어 2003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8년 자랑스런 전북인상 등을 수상했다.
◆ 신규 사업 진출 선봉 서…기술도입과 공장 건설 주역 자리매김
김 명예회장은 삼양사가 신규 사업에 진출할 때마다 선봉에 섰다. 1952년 제당사업 진출을 위해 일본 주재원으로 파견돼 기술 및 인력 확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 시작이었다. 귀국 이후에는 울산 건설 현장의 군용 양철 슬레이트로 지은 간이 숙소에서 현장 근로자들과 함께하며 공사에 매진했다.
1968년 폴리에스테르 사업 진출 시에도 기술 도입 및 공장 건설을 주도했다. 당시 김 명예회장은 기술 도입에 필요한 제반 업무를 이끌며 한 달 동안 연수생들과 숙식을 함께했다. 또 1975년 삼양사 사장으로 취임한 후에도 공장 증설 회의에 빠짐 없이 참석해 치밀한 경영관리로 삼양사의 '국내 최대 폴리에스테르 기업' 도입을 이끌었다.
1980~90년대에는 당시 첨단 소재로 각광받던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사업과 화학섬유 원료인 TPA 사업에 진출하며 그룹의 사업 영역을 화학소재 분야로 넓혔다. 이 당시의 결정으로 삼양의 화학소재 사업은 그룹 대표 주력 사업으로 성장했으며, '글로벌 삼양'의 기틀을 다질 수 있게 됐다.
◆ 평생 '중용정신'으로 대국적 의사결정 내려…혜안의 리더십 발휘
김 명예회장은 평생 '중용정신'을 앞세웠다. 또 나아설 때와 물러설 때를 정확히 구분하는 단호함으로 혜안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대표적 사례가 화섬사업 확대 중단이다. 국내 모든 업체가 경쟁적으로 시장에 뛰어들던 1990년대 고인은 돌연 화섬사업 확대 중단을 선언했다.
이어 신사업으로 추진하던 폴리에스테르 필름 사업에서도 철수했다. 이에 많은 투자가 진행된 것에 따른 우려가 이어졌지만, 김 명예회장은 결정을 돌이키지 않았다. 이 결정은 1997년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혜안'인 것으로 증명됐다.
또 현장 중시 경영도 이어갔다. '품질 좋은 물건을 생산해 적기에 공급하는 것이 제조업의 근간'이라는 지론에서였다. 고인은 경영 현장에서 뛰던 시절 매달 한 번은 공장을 순회하며 현장 직원들을 격려했다. 이 과정에서 항상 경영 환경이 어려운 사업장을 먼저 찾았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직원들과의 신뢰를 쌓았고, 협력적 노사관계의 기반이 됐다.
◆ 철저한 계획·실행과 세심한 배려…결정된 사안은 반드시 실행한 '뚝심의 경영인'
김 명예회장은 철저하고 꼼꼼한 사전 계획을 세우는 것과 함께 수립된 계획을 그대로 실행하는 '뚝심의 경영인'이었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정해진 일정은 식사 메뉴처럼 사소한 것도 바꾸지 않았다. 이는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에 기인한 것이었다.
이는 그의 커다란 책임감에서 기인했다. 고인은 생전 "회사에서 나의 책임이 가장 크기에 하루에 세 번씩 반성한다"며 매사에 최선을 다했다. 반면 일반 직원에게는 배려를 잃지 않았다.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을 검토하던 임원들에게 기업 환경이 악화됐다고 직원을 내보낼 수 없다며 인원 감축을 백지화시킨 일화가 대표적이다.
이 같은 김 명예회장의 기질은 국가를 대표하는 자리에서 더욱 빛났다. 그는 대한상공회의소장 재임 시절 국가를 대표하는 민간 경제사절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 장학재단 통한 인재 육성과 성심을 다한 대외활동…사회 발전의 '거인'으로
김 명예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도 최선을 다했다. 선친 수당 김연수 회장이 1939년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국내 최초의 민간장학재단 양영재단, 1968년 아들들과 함께 설립한 수당재단의 이사장직을 맡으면서다.
김 명예회장은 생의 마지막까지 이들 재단의 이사장으로 일하며 선친의 유업을 계승해 재단 사업을 강화했다. 한편 전주, 울산, 여수 등 주요 공장 소재지의 지역사회에도 다양한 지원을 이어갔다.
또 한때 100개가 넘는 단체의 회장직을 수행하며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온 몸으로 실천했다. 대한상공회의소장 재임 당시 거의 매일을 상공회의소로 출근하며 상공업 발전에 전력을 다했고, 전 세계 정치·경제인과 교류하며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이는 현직 경영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일화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한국 농구 발전의 역사에도 그의 발자취는 새겨져 있다. 그가 협회장으로 일한 기간 동안 한국 농구는 '농구대잔치'의 흥행, 프로농구 출범 등 전성기를 맞았다. 이 외에도 고인은 한일경제협회장, 제2건국위원회 공동위원장, 장묘문화개혁 범국민협의회장 등을 맡으며 사회 전반의 발전에 헌신했다.
이현석 기자 try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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