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조석근 기자]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수탁자책임원칙) 행사에 비상등이 켜졌다. 지난 3월 주총 시즌에서 국민연금의 의결권이 좀처럼 먹혀들지 않은 데다 대표이사 퇴진을 이끈 첫 성공사례인 대한항공의 경우 조양호 회장의 갑작 스런 별세라는 돌발 악재를 만났기 때문이다.
정치권 특히 보수 야당은 연일 '연금 사회주의'를 거론하며 비판 여론을 조성하는 분위기다. 국민연금도 향후 주주권 행사를 두고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16일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국민연금의 기금 적립금은 올해 1월말 기준 660조원이다. 노르웨이 국부펀드, 일본 공적연금펀드와 함께 세계 3대 기금으로 꼽히는 막대한 규모다. 이중 36.7%를 국내외 주식으로 보유하고 있으며 그 중 18.1%가 국내 주식이다.
현재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국내 기업은 294개다. 10% 이상만 90여개에 이른다. 국내 주요 대기업 상당수가 포함된 가운데 전체 금액은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120조원에 육박한다. 국민연금 관리 책임을 진 보건복지부 장관,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이 정치적으로 임명되는 정무직 인사들이다.
기금운용위원회 구성도 마찬가지다. 복지부 장관과 국민연금공단 이사장, 기획재정부·농림축산식품부·산업통상자원부·고용노동부 차관이 당연직으로 참석한다. 주주권 행사 의결기관인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도 기금운용위원회 추천에 따라 복지부 장관이 위촉한다. 국민연금이 지분을 소유한 기업들에 대한, 정권 차원의 광범한 경영권 침해를 경계하는 '연금 사회주의' 우려가 제기되는 배경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와 관련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7월 도입 시점부터 횡령·배임, 부당지원, 경영진 일가 사익편취, 임원보수한도 과다 등 행위를 올해 주주권 행사 관련 중점 관리사안으로 지정했다. "1년간 해당 기업과 비공개 대화를 진행하는 게 원칙이지만 개선 여지가 없을 경우 기업명 공개, 공개서한 발송, 의결권 행사 연계 등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사실 3월 주총시즌에선 좀처럼 주주권 행사가 먹혀들지 않았다. 삼성바이오, SK그룹 등에 대한 대표이사 연임 반대안을 포함해 국민연금이 반대 의사를 표명한 46개사에서 원안대로 처리됐다. 다만 국민연금이 문제를 제기한 배당과 관련 상당수 기업들이 지난해보다 배당성향을 크게 늘린 점은 성과로도 꼽힌다.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대표이사직 퇴진의 경우 대한항공이 자초한 측면도 크다는 분석이 나온다. 조 회장을 포함한 총수 일가 갑질 의혹에 대한 국민적 공분은 물론 국민연금측의 수차례 개선 요구에 대해서도 대한항공측이 외면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수탁자위원회 내부에서도 격론 끝에 조 회장의 연임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조 회장의 별세를 계기로 국민연금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수 야당과 재계의 비판에 대해 국민연금은 물론 여권도 언급을 자제하는 한편 바짝 긴장하는 분위기다. 정치권이 내년 총선 준비 태세로 접어든 국면에서 주주권 행사에 대해 적극적 입장을 표명할 경우 반기업 정서를 부추기는 모습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전문위원은 "청와대 내부에서도 기업 위축을 우려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기금운용위원회의 전문성과 독립성에 대한 시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여차하면 스튜어드십 코드 문제가 정쟁으로 옮겨 붙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연금은 중점 관리사안 대상 기업에 대해 철저히 비밀에 부치고 있다. 특정 기업이 주주권 행사 대상으로 거론될 경우 기업 주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데다 국민연금의 지분 가치도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배임·횡령 등 관리사안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당 행위에 대한 총수 일가 재판이 진행 중인 경우 혐의 자체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은 만큼 관리 관리 대상으로 삼을 경우 그 자체로 논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재판이 이뤄지고 있는 사항에 대해 주주권 행사 판단을 유보할 경우 거꾸로 진보적 시민단체들이 문제 삼기도 한다"며 "스튜어드십 코드 관련 지침 자체에 모호한 기준들이 많아 국민연금도 자체 논의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조석근 기자 mysu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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