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2001년 11월 7일 수학능력시험이 치뤄진 다음날. 앳된 모습의 여고생이 리어카에 구제 의류를 잔뜩 싣고 부산 서면시장에 등장했다. 평소 학교 안에서 친구들에게 자신이 직접 만든 카탈로그를 보여주며 옷을 판매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 진학까지 포기하며 구제 의류 판매에 자신의 모든 젊음과 열정을 쏟아부었던 그녀는 몇 년 후 신발·옷 등을 직접 만들기 시작했고, 다양한 경험을 거쳐 이제 국내외에서 주목받는 디자이너로 성장했다. 수제화 브랜드 '아크로밧'을 이끌고 있는 임재연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고졸 출신' 약점 딛고 실력으로 승부
임 대표는 미국 유럽 등 패션 중심지에서 유학한 고학력 해외파들이 즐비한 패션계에서 오로지 실력만으로 '고졸 출신'의 약점을 딛고 정상의 디자이너 반열에 올랐다.
어렸을 때 손재주가 좋아 집에 있는 천으로 여러 아이템을 만들어 친구들에게 주는 걸 좋아했다는 임 대표는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미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했지만, 집안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사업에 뛰어들게 됐다.
임 대표는 "부모님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도움을 드리고 싶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다 구제 의류를 사서 친구들에게 판매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 5만 원으로 구제 의류와 스카프, 신발 등을 구매해 친한 친구에게 입힌 후 카탈로그를 자체 제작했고, 학교 친구들에게 상품을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어 "1년여 동안 친구들을 상대로 카탈로그를 보여주고 화장실에서 상품을 판매하는 식으로 200만 원이 넘는 돈을 모았다"며 "그 돈으로 대학에 갈 수는 있었겠지만 현장에서 패션 트렌드와 기술을 배우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노점 운영을 먼저 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임 대표는 부산 서면시장에서 리어카를 끌며 노점을 운영했던 자금을 끌어모아 몇 개월만에 부산 국제시장 구제 골목에 1평짜리 소규모 점포를 얻어 '재동씨'란 간판을 달고 빈티지 숍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재동씨'는 임 대표가 고3 때 종종 친구들에게 주문받은 제품을 구입하러 갈 때마다 상인들이 부른 별명으로, 임 대표의 첫 사업장 이름이 돼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임 대표는 "시장에 갈 때 씩씩하게 다니는 제 모습을 보고 상인들이 이름 대신 '재동이', '싹싹이' 등으로 많이 불러줬다"며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바로 대학에 가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수능 시험을 본 직후 대학에 가지 않고 바로 사업에 뛰어들어서 그런지 시장 상인들이 기특하게 대해줬다"고 말했다.
임 대표는 '재동씨'를 운영하면서도 패션 디자이너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장사를 하면서도 틈틈이 패턴사, 봉제사 등을 찾아 다니며 원단 소재 분석, 바느질, 패턴 등을 부지런히 배웠고, 인터넷 등으로 패션과 관련된 정보들을 찾아보며 공부했다. 그 결과 구제 의류를 구입할 때도 좋은 상품을 구별할 수 있게 됐고, 상품에 만족한 고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부산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손님들이 몰려 들었다.
하지만 '재동씨'의 장사가 잘 되면서 주변 점포 상인들의 눈총을 받게 돼 어려움을 겪게된다. 상대적으로 손님이 적었던 상인들이 종종 시비를 걸었지만, 임 대표는 싹싹한 성격을 무기로 주변 상인들에게 커피 한 잔씩 나눠주며 갈등을 풀어갔다.
임 대표는 "재동씨가 유명해지면서 손님들이 몰려들어 주변 상인들에게 피해를 주게 됐던 것이 죄송했다"며 "조그마한 상점에서 많은 손님을 계속 받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해 온라인 쇼핑몰을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임 대표가 온라인 쇼핑몰 시장에 뛰어든 2002년은 '난닝구' 등 1세대 쇼핑몰들이 생겨난 때로, 임 대표의 동생인 임종헌 씨가 홈페이지 구축과 운영에 많은 힘을 실어줬다. 임 대표는 '빈티지샵 재동씨'를 통해 구제 의류뿐만 아니라 신발, 가방 등을 직접 제작해 판매하기도 했다.
임 대표는 "온라인 몰을 오픈한 후 구제 의류 등 빈티지 상품에 대한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고, 고객들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제시장뿐만 아니라 동대문, 해외 빈티지 숍 등의 제품도 들여오게 됐다"며 "온라인 몰을 운영하며 서울에 빈티지 상품을 좋아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서울에도 매장을 오픈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편안함이 강점"…걸그룹이 찾는 '잇템' 되다
이후 임 대표는 2호점 부산 남포동점을 거쳐 2007년 3호점인 홍대점을 통해 서울에 진출했다. 이곳에서 많은 고객들을 상대하며 사업 확대에 대한 갈증이 커졌던 임 대표는 직접 신발, 의류를 만들며 고객들의 반응을 살폈다. 또 아티스트 고객들과 잦은 교류를 하며 친분을 쌓고, 함께 벼룩시장을 하며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꿈을 다시 키웠다.
임 대표는 "'재동씨'를 운영하며 2002년 중국에 들어가 신발을 만들어 판매했지만, 품질이 좋지 않아 고객들의 불만이 많아져 생산을 중단했었다"며 "그 때의 아쉬움이 컸던 데다, 신발을 만드는 것에 대한 재미도 느껴 홍대에 매장을 오픈한 후 다시 도전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어 "벼룩시장을 하며 다양한 업계 친구들과 교류할 수 있었고, 신발을 만드는 패턴 공부를 할 수 있었다"며 "국내 신발 장인들을 만나 잔심부름을 하며 인맥을 만든 끝에 2011년 '아크로밧'을 론칭하게 됐다"고 덧붙였다.
임 대표가 만든 '아크로밧(Acrobat·곡예사)'은 편안하면서도 예쁜 디자인이 강점인 수제화 브랜드로, 여자친구·트와이스 등 인기 걸그룹 스타들이 자주 신으면서 입소문을 타게 됐다. 임 대표는 제품력을 믿고 유통 채널 확보에 나섰지만, '아크로밧' 론칭 초기에는 마케팅·시장 분석 부족 등의 이유로 사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임 대표는 "당시 국내에서는 디자이너 브랜드를 구매해야 한다는 소비자들의 니즈가 없었던 데다, 온라인 몰로만 브랜드를 론칭해 많은 이들이 '아크로밧'을 잘 알고 있지 못했던 것이 실패 요인"이라며 "2억 원의 비용으로 시작했지만, 초기에는 직원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 집을 처분하고 찜질방에서 잘 정도로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임 대표는 포기하지 않고 성수동 수제화 골목을 다니며 신발 제작에 대한 열정을 더 키워갔다. 출시 후 2~3년은 한 달에 2~3켤레 밖에 판매하지 못했지만, 브랜드 이름처럼 곡예사가 서커스를 하듯 고객들이 자유롭고 편안하게 어디서든 신고 즐길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야 겠다는 생각은 커져갔다.
임 대표는 "아크로밧을 론칭할 당시 롤모델이 딱히 없었다"며 "단지 '인체에 해가 되지 않는 신발을 만들자'는 것을 목표로 제품을 만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명품은 모양이 예쁠 수 있지만 인체를 위해 만들어진 제품이 없는 것 같다"며 "군인을 치료할 목적으로 만들었던 '닥터 마틴'처럼 인체를 연구해 제품을 만들어 누가 신어도 편한 신발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노력 끝에 임 대표는 201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SPA 브랜드 'H&M 패션쇼'에 제품을 선보일 기회를 가졌고, 그 제품들은 이후 국내외 다양한 패션쇼 무대에도 올라갔다. 또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벨기에 대사관에서 전시회를 가지며 해외 바이어들과 교류하게 됐고, 현재 미국 홍콩 영국 프랑스 일본 등에도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임 대표는 "일본 현지에서 팝업 스토어를 5번 정도 진행하며 많은 고객을 확보하게 됐고, 대만과 태국 등 동남아에서도 구매 고객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며 "이번 컬렉션부터 프랑스에 제품을 수출할 계획으로, 앞으로 '아크로밧'을 좋아하는 고객들이 있는 곳이라면 모든 곳에서 선보이고 싶다"고 말했다.
또 그는 "올해 6월쯤 롯데백화점 인천터미널점 내 편집숍에 액세서리 제품으로도 정식 입점을 앞두고 있다"며 "신발뿐만 아니라 의류, 액세서리 등 다양한 제품을 선보여 '아크로밧'을 모든 브랜드의 롤모델이 될 수 있는 브랜드로 만들고 싶다"고 강조했다.
장유미 기자 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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