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이균성 기자] 공상과학이 아니라면 시간을 거꾸로 가게 하는 방법은 없다. 그것이 인간이 발견한 시간의 법칙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흘러간 시간도 간접 체험할 수가 있다. 영화 ‘서울의 봄’은 후대들도 전두환 신군부의 잔혹함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줬다. 현실에서도 시간이 되돌려진 것과 같은 경험을 하는 경우가 가끔은 있다. 우리 모두 지난 한 달 그런 경험을 했던 셈이다.
‘서울의 봄’은 1979년 12월 12일에 벌어진 전두환의 군사 반란을 재현했다. 그로부터 45년이 지난 2024년 12월3일 이를 벤치마킹한 내란이 다시 일어났다. 이 사태를 두고 ‘서울의 겨울’이라는 패러디가 잇따랐다. 어쩌면 그리 멀잖은 시간 안에 ‘서울의 겨울’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 1979년과 달리 이번에는 모두 TV로 생생히 목격하는 바람에 영화 만들기가 쉽지 않겠지만.
역사는 진보하는 게 아니라 순환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가끔 있다. 과거의 나쁜 일이 재발할 때 특히 그러하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과연 경험이 인간을 더 성숙하게 만드는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왜 인간은 과거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하는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듯 역사 또한 거스를 수 없고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지만, 가끔은 이 믿음이 ‘정신승리’가 아닌가 싶을 때도 없잖다.
마이클 샌델의 명저 ‘정의란 무엇인가’를 여러 번 들춰보다가 끝내 다 읽지 못했다. 책이 두껍기도 했지만, 그 내용을 독파할 역량이 부족한 탓이다. 그런데 그 책을 다 읽었다 해서 더 정의로운 사람이 됐을지에 대해서는 장담할 수가 없다. ‘정의(JUSICE.正義)’는 문자이고 언어며 말이지만 그것이 설명하고자 하는 실제 내용은 문자나 언어나 말로는 제대로 그려낼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하는 탓이다.
12.3 계엄의 우두머리와 그 졸개들은 누구 못잖게 읽을 만큼 읽은 사람들이다. 어쩌면 샌델의 책도 봤을지 모른다. 그 우두머리가 입만 열면 ‘공정’을 외쳤던 걸 다들 기억하고 있다. 그 우두머리와 졸개들은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使徒)’라고 여겼을 게 분명하다. 모두가 보기에 무도(無道)한 행위를 하고서도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건 그 모든 게 ‘사도의 특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라 봐야 할 것이다.
‘정의’라는 정의(定義)가 무참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 그것뿐인가. ‘법치’와 ‘자유민주주의’는 또 어떤가. 그게 대체 무엇인가. 누가 봐도 무도한 그들의 행위 앞에 이 소중한 언어들은 그저 길거리에 나뒹구는 쓰레기와 다르지 않다. 그야말로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말이 무색해지고 단어가 다녀야 할 길이 막히고 망가졌다. 말의 길이 막히면 단어는 헛될 수밖에 없다. 뜻은 있지만, 쓸데가 없다.
왜 말의 길이 막히는가. 염치(廉恥)는 없으면서 힘만 센 자들이 말을 점령하고 멋대로 쓰기 때문이다. 특정 세력에 점령당한 깃발의 처지와 비슷하다. 1919년 3월1일 국가 단위 강도였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총칼에 맞서 유관순 열사가 피 흘리며 들었던 태극기와 12.3 계엄 우두머리를 보호해야 한다며 흔드는 태극기가 과연 같은 깃발일 수 있는가. 정의와 법치가 오염됐듯 태극기도 상징이 변질됐다.
유시민은 12.3 계엄 수괴를 ‘박물관의 코끼리’에 비유했다. 코끼리가 움직일 때마다 소중한 유물이 박살 날 수 있다. 틀린 지적은 아니다. 하지만 간과한 게 있다. 유시민이 본 코끼리의 행동은 무의식에 가깝다. 그런데 계엄 이후 상황을 보면 그것을 무의식의 소산으로 보기는 어렵다. 12.3 계엄과 그 이후 행동은 의식을 가진 파렴치한(破廉恥漢)들이 벌인 난동이다. 그들은 코끼리가 아니라 인간이다.
문제는 파렴치다. 부끄러움을 파괴하는 일 말이다. 그럴 때 참사가 발생하곤 한다. 무엇이 부끄러움을 파괴하는가. 개인적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주범이겠고, 사회적으로는 염치를 상실하고 변질된 대의명분이 주범일 수 있다. 히틀러를 비롯해 수많은 독재자는 언제나 그럴듯한 명분을 내걸었다. 이 명분이 염치를 잃을 때 언어도단의 상황이 발생한다. 말의 길이 막히고 언어는 흉기로 변한다.
불행히도 헝클어진 얼굴을 보여주는 거울은 있지만 파괴된 염치를 보여주는 거울은 없다. 거울이 없기에 파렴치한은 자신의 파렴치를 보지 못한다. 염치를 살피기보다 거울을 보고 얼굴을 뜯어고치는 데만 능한 족속한테 나라를 맡긴 후환이 크다. 염치없는 자가 권력을 잡고 변질된 대의명분을 멋대로 휘두를 때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곤 했다. 역사는 이를 반복했고, 그럴 때마다 큰 대가를 치렀다.
/이균성 기자(sereno@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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