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수기자] 현모양처로 널리 알려진 신사임당은 실제로 그 행적이 남아 있지 않다. 후대에 전하는 시 몇 편과 글씨 그림 몇 폭이 전부다.
그녀는 율곡 이이를 숭배하는 우암 송시열이 율곡의 어머니인 사임당을 현모양처로 추앙하기 시작하면서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잘 키운 여자로 알려지게 됐다. 하지만 사임당은 현모양처라기보다 시인이며 화가인 예술가에 더 가깝다. 글씨나 그림이 많이 남아 있지 않지만 당대는 물론이고 후대까지 뒤흔들었다.
신간 '그리운 조선여인 사임당'은 조선시대 여인 사임당의 예술혼과 사랑을 재해석한 책이다. 그녀의 시를 읽고 그림을 보면서 그녀의 흔적을 찾아가다가 보면 조선의 아름다운 여인을 오롯이 만날 수 있다.
사임당은 어떻게 해서 천재 시인이자 화가가 됐을까.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어린 딸의 재주를 사랑해 몽유도원도를 그린 조선시대 유명한 화가인 안견의 그림을 구해줘 공부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여자가 시를 짓고 그림을 자유롭게 그릴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사임당은 학문과 예술 활동이 제한돼 있던 시대에 주옥같은 작품들을 남겨 더욱 빛이 나는 것이다.
사임당의 일생은 자세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마흔여덟 살을 일기로 생을 마친 그녀는 평생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던 강릉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시가의 선영 두운리 자운산 기슭에 묻혔다.
사임당이 죽은 뒤 이이가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가 되면서 그의 제자들이나 후인들이 이이를 떠받들기 위해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사임당을 숭배했다.
그러나 사임당은 그들의 숭배가 아니더라도 학문과 예술적 경지에서 조선시대 어떤 여인 못지않게 뛰어났다. 그림은 당대에 이미 국중 으뜸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서체도 독특한 필체를 개발했을 정도로 우아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불과 두 편밖에 남지 않은 그녀의 시도 탁월하다.
사임당의 4남 3녀 중 이름을 남긴 사람으로는 이이, 금기서화에 뛰어나고 시인으로 명성이 높은 딸 매창, 그림으로 유명한 아들 우 등이 있다. 사임당의 흔적은 강릉 오죽헌, 파주 율곡리 등에 오롯이 남아 있다. 특히 오죽헌에는 조선 여인의 아름다운 향기가 그대로 남아있다. 당대를 뒤흔들고 현모양처로 추앙받는 사임당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사랑을 그리워하고 그녀의 눈물과 한숨이 가뭄하게 떠오른다.
(이수광 지음/스타리치북스, 1만5천원)
문영수기자 mj@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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