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인망식 인력 빼가기, 벤처기업은 존폐위기


[생태계없이 IT코리아 없다 ④무너진생태계]

#모바일 솔루션 기업 A 사장은 "핵심 프로젝트를 담당하던 인재가 올 초 삼성전자로 넘어갔다"며 "그 때문에 4개월이나 공들였던 프로젝트가 스톱됐다"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삼성·LG가 사람 빼가면서 다들 울상"이라면서 "회사 문닫아야 할 판인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스마트폰 시대가 열리며 다시 인기를 끄는 분야가 소프트웨어 관련 직종이다. SW 개발 3년차 였던 B 씨는 "당시 연봉이 2천500만원이 채 안됐는데, 4천만원 넘게 제시하는 대기업으로 누가 안갈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인재 키워놓으면 대기업이 '덥썩'

중기벤처 기업들이 대기업의 인력 빼가기에 허덕이고 있다. 무차별적인 인력 빼가기로 핵심사업이 중단위기에 빠지면서 중기 벤처기업들은 생존의 존폐를 걱정하는 신세가 됐다.

모바일 솔루션 업계에서는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까지 삼성전자나 LG전자 등과 그룹 계열 IT회사가 중기벤처 업계로부터 수급한 인력이 1천500~2천명 규모가 될 것이라는 추정도 나온다.

특히 중기벤처회사들은 "대기업이 탐내는 인력들은 핵심인력이 대부분이어서, 회사에서 한두 명만 빠져나가도 진행중인 프로젝트에 차질을 빚을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업계 한 관계자는 "회사별로 1~2명, 혹은 3~4명이라고 해서 숫자가 적은 게 아니다"라며 "2~3가지 핵심 프로젝트로 승부를 거는 벤처 입장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일"이라고 걱정을 털어놓았다.

솔루션업계의 한 CEO는 "개인 사정으로 일을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삼성으로 갔다"며 "주위에 한명씩 한명씩 넘어간 숫자를 세어보면 10명 가까이 되는 벤처도 있다"고 귀띔했다.

특히 모바일 분야의 '인력 쓰나미'는 애플 아이폰의 상륙 이후 심해졌다. 본격적인 스마트폰 경쟁에 불이 붙은 지난해부터 모바일 개발자들의 수요가 크게 늘어났다.

아이폰 인기에 충격을 받은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기존 피처폰 중심 제품 라인업을 스마트폰으로 급격하게 전환하는 과정에서 SW 개발 인력을 발빠르게 흡수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500명 남짓 하던 개발인력을 2천명 선으로 늘린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의 개발인력 확충은 아이폰이 국내 시장에서도 파란을 일으키며 승승장구하자 고급사양의 국내외 휴대폰 시장에서 밀릴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으로 풀이된다.

당시 휴대폰 단말부문 최고위 경영진은 개발인력을 무제한 늘려서라도 아이폰과 유사한 성능과 가격의 제품을 단기간에 내놓도록 주문했다. 결국 몇 개월 뒤 아이폰과 경쟁할 갤럭시 시리즈를 내놓았다.

벤처업계 한 관계자는 "당시 핵심 플랫폼인 OS 개발자 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영상, 게임 등 전방위에 걸쳐 빼갔다"며 "벤처에서만 데려간 게 아니겠지만, 2천명 가량으로 늘어난 삼성 개발인력의 절대 다수는 중기벤처 기업에서 확보한 인력"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통 연봉이나 조건을 파격적으로 제시하니까 개발자들도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며 "거기에다 별도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본인으로서는 '커리어'에도 도움이 되니 막을 수도 없다"고 고충을 털어놓았다.

한 중견벤처기업의 임원은 "무선인터넷산업연합회나 벤처협회 등이 중심이 돼 동반성장위원회에 문제제기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면서 "의료, 항공, 건설 등 어느 분야 할 것 없이 갈수록 대기업의 중소기업 인력 빼가기가 늘어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이 임원은 "특허나 지적재산권 등 회사기밀 사항과 관련이 있는 직원이 아닌 일반 개발자의 경우 소송 제기 등 법적으로 풀어갈 방법이 없어 문제 제기를 하기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중소벤처는 생존의 문제지만, 개별 개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능력을 인정받아 대기업으로 스카우트 되는 것이 부적절하다고만 볼 수 없는 측면이 있다. 벤처들이 문제 제기를 강하게 하지 못하는 것도 '직업 선택의 자유' 때문이다.

◆아랫돌 빼 윗돌 막는 '부실 생태계'

문제는 생태계 순환의 기본이 되는 중소벤처기업에 인력이 원활하게 공급되지 못하는데 있다. 이공계 기피현상이 여전한 상황에서 중기벤처로 뛰어드는 IT 인력들을 대기업이 저인망식으로 빼가면서 생태계 구조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것.

생태계의 순환구조를 깨는 쳇바퀴가 계속 돌다보면 대기업만 존재하고 실력 있는 벤처기업이 존재하지 않는, 그래서 결국 대기업도 창의적인 우수인력을 공급받지 못하는 악순환의 생태계로 굳어진다.

중기벤처 업계에서는 이같은 문제 해결을 위해 대기업이 일정부분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대기업이 중소기업 인력을 채용하면 해당 중소기업에 일정한 금액을 지불하는 '이적료' 개념의 제도를 도입하거나, 개발자 육성을 위한 프로그램 운영기금 조성에 대기업이 적극 나서 달라는 것.

벤처기업 관계자는 "현실적으로 도입해볼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보면, 대기업들이 6개월~1년 가량의 전문적인 인력육성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는 기금을 지원해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등 중기벤처와 생태계 구축에 함께 나서는 것도 사회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벤처기업인들은 인력 빼가기 등의 근본적 처방과 관련, 그 어떠한 지원책보다 성공하는 벤처가 많아지면서 스스로 벤처에 뛰어드는 인재들이 늘어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또 성공한 벤처가 대기업으로 성장하거나 거액으로 M&A 될 수도 있는, 그런 환경이 어색하지 않는 사회적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지적한다. 열심히 일하다 실패한 벤처인에게 '주홍글씨'를 새길 게 아니라, 재기해 일어설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아울러 대기업 중소기업 사이에 '공정한 거래의 룰'이 지켜져야 한다는 지적도 여전하다.

창의력을 가진 청년들이 끊임없이 벤처에 도전하는 튼튼한 생태계. 하지만 지금의 '인력 빼가기'기 현실은 우리 사회가 상생의 생태계와는 아직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특별취재팀 it@inews24.com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