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세브란스 병원에서 출발한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운구가 20일 오후 4시40분경 국회에 도착했다. 김 전 대통령은 오는 23일 국회에서 열리는 영결식 후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영면에 들어가게 된다.
철저한 의회주의자였던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가는 길이 대결과 정쟁으로 얼룩진 국회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지난 61년 5대 국회에 입성한 이후 내리 6선을 지낸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고 국회에서 민주화의 완성을 이루고자 했다. 그는 국회 우선주의자였다.
지난 64년 4월 제6대 국회의원이었던 김 전 대통령이 5시간19분 동안 쉬지 않고 연설했던 일은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유명한 일화로 기억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비밀회담으로 일본 비자금 1억3천만 달러를 받았다"고 폭로한 김준연 의원의 구속동의안 상정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인은 지금보다 더 열악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국회 내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숙고 끝에 선택한 것이 필리버스터링(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한 것이다.
이 뿐 아니라 벼랑 끝에 몰렸던 무수한 사건 속에서 김 전 대통령은 국회를 통한 해결 원칙을 고수했다. 오랜 야당 지도자로서 숱한 장외투쟁을 해 왔지만 '원내외 병행투쟁'으로 정면돌파를 시도했다.
김 전 대통령은 지난해 6월초 민주당 원내대표단이 예방한 자리에서 "국회의원은 국회에 들어가야 한다. 원내에서 싸우라고 국민이 뽑아준 것이다. 수십년 나의 경험과 의회주의 원칙을 보더라도 국회는 오래 비우지 않는 게 좋다"며 민주당의 등원을 조언한 것도 의회주의 원칙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나아가 김 전 대통령은 "야당을 하면서 원내에 등원하지 않고 성공한 적이 없다"며 "3선 개헌에 앞서 나는 '국회로 들어가 개헌을 저지하자'고 했는데 유진오 박사 등이 반대해 계속 밖에서 싸웠고, 아무런 성과를 못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최근 미디어법 강행 처리 논란으로 민주당 등 야당이 국회를 떠나 장외투쟁을 벌인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18대 국회는 시작부터 지금까지 여야 대결의 연속이었다. 국회 원구성 협상이 무려 8개월 만에 타결되면서 그 사이 국회는 공전됐다. 이어 벌어진 미국산 쇠고기 파동으로 국회는 또 다시 올스톱됐고 여야 대결은 극에 달했다.
이어 여당의 한미FTA 비준안 기습상정으로 인해 국회에는 해머와 전기톱까지 등장하는 사상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미디어법 등 쟁점법안 처리를 둘러싸고 지난해와 올 상반기까지 여야는 무려 세차례 걸쳐 입법전쟁을 벌였다.
지난 6월 국회에서는 미디어 관련법을 여당이 강행 처리하면서 '대리투표', '무효투표' 등 논란이 벌여졌고, 민주당 등 야당은 또 다시 장외투쟁에 돌입하면서 9월 정기국회도 기약하기 어려운 상태.
그간 국회는 여야 대결과 파탄, 반목과 갈등의 연속이었고 갈등의 조정자 역할을 해야 할 국회는 국민들로부터 '갈등의 진원지'로 각인됐다.
이념·지역 통합을 최대 과제로 삼았던 김 전 대통령 서거가 앞으로 국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의회주의자였고, 지역 및 사회 통합을 위한 헌신한 김 전 대통령의 마지막 길을 국회로 택한 것은 매우 큰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영결식을 국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한 것도 이념·지역·계층·정파로 분화해온 대한민국을 화합의 새 장으로 돌려세워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반영된 것이다.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은 "유가족의 뜻을 존중하고 고인의 생전 업적을 기리며 사회통합의 대승적 의의를 위해 국장으로 추진하기로 했다"고 설명하면서 "이 대통령이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고 사회의 융화와 발전을 위한 계기를 마련하는 게 좋겠다고 해 국장으로 결정했다"는 점을 각별히 강조했다.
김 전 대통령 유족도 이 대통령과 정부에 감사를 표시했고, 국격을 위해 국장을 제안한 민주당도 환영하고 있다.
유족측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국회는 민주주의의 상징이고 미래의 전당"이라며 "김 전 대통령은 민주주의와 의회주의를 위해 많은 공적을 남겼다"고 국회를 빈소 및 영결식 장소로 선택한 배경을 설명했다.
이처럼 김 전 대통령의 빈소와 영결식이 국회에서 치러지는 만큼 정치권도 김 전 대통령의 유훈을 받들어 야당의 원내 복귀와 여야의 대립과 반목이 대화와 화합이라는 전환점이 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도 나타나고 있다.
여당측 한 의원은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서거하신 상황에서 야당도 장외투쟁을 접고 국회로 들어와야 한다"면서 "지금은 서로 감정이 쌓여 있지만 국회에서 이러한 앙금도 털어내야 한다"며 김 전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민주당의 복귀를 기대했다.
야당측 한 관계자는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여야간 대립이 해소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이처럼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여야의 대립과 반목이 대화와 화합으로 전환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도 나타나고 있다.
허용범 국회 대변인은 이날 기자와 통화에서 김 전 대통령의 빈소와 영결식이 국회에 마련된 데 대해 "김 전 대통령은 의회주의자일 뿐 아니라 의회가 정치의 중심으로 위상을 회복하고 이를 계기로 여야와 국민이 화합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국회를 중심으로 한 여야의 화합과 국민적 통합의 전기 마련의 계기가 됐으면 하는 기대감이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충격적인 서거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김 전 대통령의 서거가 정치권에 어떠한 변화의 바람을 가져올지 주목되지 않을 수 없다.
민철기자 mc0716@inews24.com·사진 박영태 기자 ds3fa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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