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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횡단 도전기] <27> 실크로드 '타임캡슐' 돈황. 혜초스님 '왕오천축국전'


돈황은 감숙성 하서회랑(란주에서 돈황까지 900킬로)의 끝자락에 위치 해있다. 중국은 동서 영토가 매우 긴 나라임에도 북경을 기준으로 표준시가 한 개의 나라이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갈수록 아침 일출 시각은 늦어지고, 저녁 일몰 시각도 9시 이후로 계속 늦어진다.

오늘은 돈황 '막고굴'(莫高窟) 천불동(千佛洞)에 갈 예정이다. '천불(千佛)'은 1000개 부처가 아니라 '많다' 의미이다. 돈황에 부처상이 있는 석굴은 남쪽 492개, 승려들이 살았던 북쪽 240여 개 등 전체 석굴 수는 730여 개이다. '종교와 신(神)'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문화이다.

하서회랑 실크로드 자동차 여행 경로. [사진=윤영선]
하서회랑 실크로드 자동차 여행 경로. [사진=윤영선]

'신과 종교'는 인류가 창조한 가장 위대한 발명품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 신(神)을 발명한 인간은 신도 인간처럼 선물을 받는 것을 원하고, 화려한 집에서 살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제물(祭物)과 공물을 신에게 바치고, 많은 돈을 들여서 신들의 집인 화려한 성전(聖殿)을 건설했다. 자기가 믿는 신이 최고의 신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종교를 믿는 종족과 전쟁을 벌이고, 이교도(異敎徒)를 박해하기도 했다.

실크로드는 '종교의 길'이다. 서쪽에서 불교,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기독교 등이 동쪽 중국으로 왔다. 현재 불교를 제외한 나머지 종교는 9세기 중반 당나라 황제의 금지령으로 중국에서 없어졌다. 조로아스터교, 마니교의 귀중한 경전이 돈황석굴에서 발견되었다.

실크로드를 따라서 수많은 불교 석굴(성전)이 건설되어 있다. 인도 아잔타 석굴에서 아프가니스탄, 투르판의 베제클리크 석굴, 쿠차의 키질 석굴, 중국의 4대 석굴(용문, 윈강, 맥적산, 돈황), 경주의 석굴암까지 실크로드는 불교 석굴이 곳곳에 많다.

7월 하순 돈황은 건조한 기후 때문에 새벽 공기는 상쾌하다. 우리는 아침 8시 30분부터 입장하는 돈황석굴 입장권을 어제 미리 예매하였다. 아침 일찍 도착했는데 중국인 관광객으로 인산인해이다.

입장권 가격은 160위안, 해설사 20위안 합계 1인당 180위안(3만 4000천원)으로 6년 전보다 많이 올랐다. 입장을 위해 줄을 서서 한참 기다렸는데, 외국인은 외국인 줄에 별도로 서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 맥이 빠진다. 외국인은 입장하는데 여권 확인 두 번 등 복잡하다. 서구 국가 등 외국 관광객은 별로 없다. 주차장에서 버스를 타고 10분 이상 이동해야 막고굴 입구이다.

중국인 해설사 한 명당 관광객 30명씩 배정되어 해설사를 따라가야 한다. 석굴 관람은 1인당 8개 동굴만 관람이 가능하다. 6년 전은 자유롭게 2층, 3층 등 모든 석굴을 계단으로 올라가서 볼 수 있었다. 현재는 요금도 올리고, 관람 석굴 수도 8개로 크게 줄였다.

하서회랑 실크로드 자동차 여행 경로. [사진=윤영선]
돈황 천불동 막고굴 석굴. [사진=윤영선]

막고굴의 앞면은 작은 개천이 흐르고, 뒤쪽은 명사산 절벽이다. 작은 실개천이 흐르는 양옆은 포퓰라 나무 등이 무성하다. 이곳 개천의 진흙으로 불상의 소조를 만들고, 과거 승려들의 식수원이다. 사막을 흐르는 하천은 사막의 모래 속으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강물처럼 바다나 호수로 흘러가지 아니한다.

실크로드 여행에서 꼭 한 도시만 가라고 한다면, 돈황석굴을 가야 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돈황석굴은 '막고굴'(莫高窟))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막의 높은 절벽에 있는 굴이라는 뜻이다. 돈황석굴 시작은 서기 366년 '낙준'이라는 떠돌이 승려가 '명사산' 옆을 지나다가 현재 위치에 '관세음보살'이 현신하는 것을 보고, 사암으로 형성된 명사산 절벽 바위에 굴을 파고 수도를 시작한 것이 시작이다.

4세기 이후 14세기 명나라까지 천 년 동안 많은 역대의 왕조, 귀족들이 492개의 석굴을 조성하였는데 당나라 때 가장 많이 만들었다. 당나라 시대 225개, 수나라 97개, 티베트 지배 70개 등이다. 실크로드 전성기인 당나라 시대 만든 것이 가장 많다.

돈황석굴은 세 가지 면에서 훌륭하다. 첫째는 진흙으로 빚은 수많은 부처와 보살 소상(塑像)이 약 1700개라고 한다. 부처 소상은 무게와 크기 때문에 약탈을 면해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두 번째는 모든 석굴의 벽면과 천장을 화려한 그림으로 채색한 엄청난 '벽화'이다. 석굴 전체 벽화 길이가 5미터 폭으로 계산하면 50킬로미터에 달한다고 한다.

석굴마다 화려하게 채색된 부처 소상이 있고, 동굴의 4면은 벽화로 채워져 있다. 현재는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다. 오랜 세월이 흘러서 퇴색한 벽화의 색상을 다시 복구해서 매우 화려하다.

부처 소상과 벽화의 안료는 공작석(초록색 염료), 청금석(푸른색 염료) 등 서역에서 수입한 값비싼 안료로 만들었다. 과거 청금석 안료 값이 금값보다 비쌌다고 하니 엄청남 돈이 들어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서회랑 실크로드 자동차 여행 경로. [사진=윤영선]
돈황석굴 화려한 채색 벽화. [사진=윤영선]

부처, 보살 등 소조(塑造)는 근처 개천의 진흙으로 만들었다. 장인들이 진흙에 볏짚, 양털, 꿀, 광물질 등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천년을 지나도 그대로이다. 돈황 벽화는 간다라, 인도, 페르시아, 중국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고 한다. 예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인류의 보고이다. 서쪽으로 갈수록, 오래전에 만들 것일수록 석굴 양식은 간다라와 인도양식에 가깝다.

17호(관리를 위해 석굴에 일련번호를 붙여 놨다) 굴은 '도서관 석굴' 장경동(藏經洞, Library Cave )이다. 16호 석굴의 부속 석굴로 16홀 굴의 입구에 만든 굴이다.

돈황석굴의 세 번째 특징은 17호 장경동 석굴에서 발견된 4만 권장서이다. '장경동'(藏經洞)은 경전과 문서를 보관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영어로 'Library Cave'(도서관 동굴)이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기는 서구 국가의 제국주의 시대이다. 당시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등이 중앙아시아 유물 약탈에 관심이 많았다.

유럽인들은 '장경동'에서 발견된 장서에 관심이 많아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의 탐험가들이 돈을 주고 많이 사 갔다. 미국의 하버드대학은 가장 늦게 돈황에 도착했다. 이미 장경동 고서적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등이 가져갔기 때문에 미국은 비단에 그린 그림, 화보를 사 갔는데,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비단 그림이라고 한다.

돈황석굴이 세계적으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1900년 17호 굴 '장경동'(Library Cave)의 발견 때문이다. 장경동(藏經洞)에 보관 중이던 장서와 문서가 서구에서 가져가고, 이 자료를 바탕으로 '돈황학'이라는 역사학 분야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장경동에는 세 사람의 주역이 있다.

청나라 말기 도교 도사인 '왕원록(왕도사), 영국의 오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 세 사람이다. 우리는 16호 석굴과 부속 석굴 17호 장경동 석굴을 관람하였다. 왕도사가 장경동 17호 비밀 석굴을 발견한 얘기는 매우 흥미 있다.

왕도사는 19세기 말 청나라 군인 출신으로 제대 후 도교 도사가 된 사람이다. 1900년 17호 석굴 발견 당시 왕도사는 폐허 수준인 16호 석굴에서 조수 한 사람과 함께 거주하고 있었다.

왕도사는 거의 문맹 수준이다. 글씨를 아는 조수를 고용해서 지역 주민에게 주문받은 불경을 필사에서 파는 일을 한다. 어느 날 저녁 왕도사는 조수를 크게 꾸짖는 일이 발생했다. 조수는 담배를 피우면서 화를 삭이다가 16호 석굴 벽면에 담뱃대를 툭툭 털었는데, 벽에서 울림이 있는 공명 소리를 듣게 된다.

하서회랑 실크로드 자동차 여행 경로. [사진=윤영선]
돈황석굴 안내판에 있던 혜초스님 '왕오천축국전' 자료. [사진=윤영선]

왕도사와 조수는 이상하게 생각하여 벽을 허물었더니, 벽 속에 작은 굴(17호 석굴은 가로세로 2.9미터, 높이 2.66미터의 작은 방)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곳에 4만 점에 달하는 각종 종교의 경전, 계약서류, 편지, 변문, 비단화 등이 들어있었다. 석굴의 폐쇄된 연도는 1002년이다. 문자 그대로 900년 동안 잠자고 있던 '타임캡슐'이 개봉된 것이다.

내가 이번에 17호 석굴의 벽두께를 재보니 약 15센티 이상 두꺼운 벽인데, 담뱃대 두드리는 울림소리를 듣고 비밀 동굴을 발굴한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장경동 보관 장서는 인근에 있던 '삼계사' 사찰에서 필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삼계사는 장안의 사찰을 포함하여 많은 사찰에서 경전을 빌려다 필사하여 보관 중이었다. 17호 석굴에 4만 점 장서를 1002년 보관 후 봉인한 원인은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삼계사'가 불필요한 장서를 이곳에 보관 또는 당시 신흥 국가 서하(西河)가 돈황을 침략할 때 이곳에 장서를 넣고 피난 갔다. 는 설이다. 왕도사는 17호 석굴 발견 후 청나라 관리에게 장서 발견을 신고했으나, 청나라 말기 조정은 장경동에서 발견된 경전에 관심이 없었다.

인도에 있던 영국인 '오렐 스타인'은 돈황에서 많은 고문서가 발견된 소문을 들게 된다. 그는 돈황에 와서 1907년 왕도사를 설득하여 7000점의 서류를 사 갔다.

고문서 발견 소문을 들은 프랑스의 '펠리오'도 1908년 돈황에 도착하여 역시 7천 점의 서류를 사 갔다. 프랑스인 펠리오는 언어의 천재로 13개 외국어에 능하고 중국어도 능한 사람이다. 펠리오는 장경동의 남은 경전을 전부 읽어보고 알짜배기 서류 7천 점을 골라서 사 갔다. 펠리오가 사간 서적에 혜초스님의 '왕오천축국전'이 포함되어 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이 장경동 문서를 사 간 것을 뒤늦게 알고 중국은 1만 점의 서류를 북경도서관에 보관하고 있다. 경전을 발견, 판매한 왕도사는 중국 역사학계에서 매국노로 낙인찍혔지만, 경전 판 돈을 돈황석굴 보관에 사용하였다. 1931년 사망한 그의 묘비가 돈황석굴 근처에 있다고 한다.

장경동 서적은 한자, 산스크리스트어, 티벳어, 소그드어, 호탄어, 고대 언어 등 다양한 언어로 작성된 고대 문서의 타임캡슐이다. 희귀한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경전도 있고, 히브리어로 된 기독교 기도문 등 다양한 종교자료가 있다. 1000년 전에는 종이가 귀하던 시기라 '장안'에서 사 온 이면지에 필경사 견습생들이 글씨를 연습했다.

이러한 글씨 연습용 종이가 버려지지 않고 17호 장경동에서 보관하고 있다. 글씨 연습장으로 사용한 종이의 뒷면에 남아있는 각종 서류(예, 전당포 서류, 채무증서, 문학 서류 등)는 천년 이전 서민들의 실생활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역사서에 기록하지 아니하는 서민들의 실상, 오아시스 도시의 고대 고문자, 현재 없어진 종교 경전 등이 '돈황학' 학문의 배경이다.

6년 전 돈황에 방문했을 때 막고굴 입구 안내판에 '왕오천축국전' 원본 사진이 한국인 관광객을 위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가보니 제거하고 없어서 아쉬움이다.

하서회랑 실크로드 자동차 여행 경로. [사진=윤영선]
1300년 전 혜초스님 여행경로. [사진=윤영선]

1908년 프랑스의 '폴 펠리오'가 가져간 서적 중에 '혜초' 스님(서기 704~787년)이 쓴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이 포함되어 있었다. 펠리오가 발견한 '왕오천축국전'은 제목도 없고. 저자 이름도 없고, 앞뒤 표지가 없는 6000여 요약본 서류였다.

펠리오는 이 문서를 연구하여 1909년 당나라 시대 혜초스님의 여행기라는 사실을 논문에 발표하였다. 청나라 학자가 책 제목이 '왕오천축국전'임을 추후 확인하였다. 다시 1915년 일본학자(가카쿠스 준지로)가 혜초의 국적이 당나라가 아닌 '신라' 승려로 밝혔다. 우여곡절 끝에 1300년 전 모험가 신라인이 세상에 나타났다.

왕오천축국전은 혜초가 723년경부터 727년까지 4년 동안 인도의 오천축(동서남북 중앙)과 중앙아시아 40여 국가를 다녀온 여행기이다. 중국 광저우에서 배를 타고 동인도로 갔다가, 귀국은 파미르고원과 타클라마칸 사막 등을 거쳐서 육로로 왔다.

중국 오대산에서 입적하신 분이다. 왕오천축국전은 간략한 자료이지만 1300년 전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국가의 풍속, 종교, 역사,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사료로 가치가 크다. 원본은 상중하 3권으로 추정하는데 분실되었다.

혜초는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동북부, 우즈베키스탄 등을 다녀온 최초의 한민족 모험가이다. 지금부터 1300년 전 20대 신라의 젊은이가 혈혈단신 혼자서 돈도 없이 인도와 유라시아 대륙의 무전(無錢)여행을 갔다 온 것이다. 오늘날 세계로 향하는 우리 청년들에게 멋진 모델이다.

하서회랑 실크로드 자동차 여행 경로. [사진=윤영선]
돈황석굴 막고굴 정문 출입로. [사진=윤영선]

돈황석굴에 신라 관련 석굴 둘이 더 있다. 61호 석굴의 벽화 오대산도 그림에 신라 사찰 송공사(신라인 5명 그림)가 있다. 355호 석굴은 조어관을 쓴 신라인 2명이 나온다. 경주에서 사신으로 장안에 갔던 관리들이 왕족의 부탁으로 멀리 돈황에 시주하러 갔던 흔적이다.

신라인들이 실크로드 중심도시 서역의 돈황까지 진취적으로 교류했던 역사적 흔적이다. 돈황석굴 장경동 문서 중에 우리 '국립중앙박물관'에도 48점이 있다. 일본인 탐험가 오타니가 중앙아시아의 유물과 문서를 구입 또는 약탈하여 왔다.

오타니는 일본 황실 가족으로 영국 런던에 유학 중 오렐 스타인의 돈황 유물 소문을 듣고, 원정대를 편성하여 중앙아시아의 많은 유물을 일본에 가져왔다. 오타니는 자금난으로 파산하고, 그의 컬렉션의 1/3이 광산업자에 팔렸다. 일본 광산업자는 조선의 광물권 획득을 위해 조선총독부에 오타니 유물을 기증하였다.

해방 후 조선총독부에 남았던 유물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중앙아시아 자료실에 전시되고 있다. 돈황석굴을 고대 중앙아시아 역사의 '타임캡슐'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하서회랑 실크로드 자동차 여행 경로. [사진=윤영선]
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 회장.

◇윤영선 심산기념사업회 회장은 서울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 석사, 가천대학교 회계세무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제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국세청, 재무부 등에서 근무했으며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기획재정부 세제실장, 제24대 관세청장,삼정kpmg 부회장, 법무법인 광장 고문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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