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김종성 기자] 미-중 무역전쟁에서 시작된 '반도체 전쟁'에 일본과 유럽연합(EU)까지 보조금 경쟁에 가세하며 반도체 산업이 '머니게임'의 장(場)이 되고 있다. 글로벌 반도체 산업의 지각변동으로 한국의 '반도체 강국'의 지위가 강하게 위협받는 가운데, 한국의 K-반도체 산업 현황과 정부 지원의 문제점을 짚어본다. [편집자]
[아이뉴스24 김종성 기자]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중국 등 세계 각국이 자국의 반도체 산업 육성과 보호를 위한 천문학적인 보조금 지급 경쟁을 펼치면서 첨단 반도체 산업이 '머니게임'의 장이 되고 있다.
기업에 대한 이런 방식의 정부 지원이 공정한 자유무역 질서를 해치는 '반칙'이라는 비판에 미국, 일본 등은 아랑곳 하지 않는다. 각국 정부는 '무역 장벽'을 높이며 자국 내 반도체 기업의 생산시설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는 모양새다.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이 촉발시킨 '반도체 전쟁'이 격화되는 가운데 생성형 인공지능(AI) 산업의 폭발적인 성장은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의 공급망 재편을 촉진시키고 있다. 향후 AI 시대에 반도체 패권 선점을 위한 국가간, 기업간 치열한 수싸움 속에 'K-반도체'의 차별화된 생존 전략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한 이유다.
◇ 美, 자국 생산 설비 유치에 '반도체 보조금' 등으로 5년간 총 70.5조원 지원
9일 로이터통신 보도에 따르면 미 정부는 다음 주 '칩스법(반도체 지원법)' 보조금으로 삼성전자에 60억~70억 달러(약 8조1000억~9조5000억원)을 지급할 것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번 보조금은 삼성전자가 2021년 발표한 170억 달러(약 23조원) 규모의 텍사스 테일러 팹(반도체 생산시설)을 포함해 또 다른 팹과 첨단 패키징 시설, 연구개발(R&D) 센터 등을 짓는 데 쓰일 것으로 전망된다.
미 정부의 보조금 발표를 앞두고 미국 텍사스주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가 투자 규모를 기존 170억 달러(약 23조원)에서 440억 달러(약 59조5000억원)로 대폭 증액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2022년 '칩스법'을 제정해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생산 보조금 총 390억 달러(약 52조2000억원), 연구개발(R&D) 지원금 총 132억 달러(약 17조7000억원) 등 5년간 총 527억 달러(약 70조5000억원)을 지원하도록 했다.
미국의 이같은 조치는 세계 반도체 산업 지형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전략 경쟁 상대인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최대한 억제하기 위한 것이다. 자국 기업 인텔에 이어 대만의 TSMC, 한국의 삼성전자 등에 대규모 보조금을 지급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내 투자를 유도하고 있다.
미국은 지난달 자국 기업 인텔에 직접 보조금 최대 85억 달러(약 12조원)과 대출 110억 달러(약 16조원) 등 총 195억 달러(약 26조원)을 지원한다고 발표했다. 전날은 대만 TSMC에 66억 달러(약 8조90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50억 달러(약 6조8000억원) 규모의 저리 대출을 제공하는 등 총 116억 달러 규모의 대규모 지원 방안을 발표했다.
TSMC는 미국 투자액을 기존 400억 달러에서 650억 달러로 62.5% 증액하기로 했다. 미국 애리조나주에 공장도 하나 더 추가해 총 3개를 짓는다. 현재 TSMC는 400억 달러를 들여 애리조나주 피닉스에 공장 두 곳을 건설하고 있다.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가드레일' 조항으로 중국내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장하는 데 제한을 받는다. 미국내 투자를 유도함과 동시에 경쟁 상대국인 중국을 첨단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전략적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 日 '반도체 부활'· EU "2030년 반도체 시장점유율 2배"…韓 정부 "전시 상황에 맞먹는 총력 대응"
일본도 반도체 보조금 투입을 통해 '반도체 생산 르네상스'를 되찾겠다는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다. 지난달 24일엔 구마모토현에 위치한 TSMC 제1공장이 개소했다. 일본은 TSMC 제1공장 설비 투자액의 절반 가까운 최대 4760억엔(약 4조2000억원)의 보조금을 TSMC에 제공키로 했다.
TSMC는 2027년 가동 예정인 제2공장도 구마모토현에 짓기로 했다. 일본 공장은 제2공장에도 최대 7320억엔(약 6조5316억원)을 투입할 방침이다. 두 공장에만 10조원이 넘는 일본 정부의 보조금이 투입되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또 도요타와 NTT 등 자국 대기업들이 협력해 만든 반도체 제조사인 라피더스에도 9200억엔(8조1000억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하는 등 첨단 반도체 생산국으로의 부활을 도모하고 있다.
EU도 보조금 경쟁에 가세했다. EU는 현재 약 10%인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2030년까지 20%로 2배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지난해 9월부터 이와 관련한 반도체법이 발효됐다. EU는 33억 유로(약 4조8000억원)의 예산과 민간 투자를 포함해 총 430억 유로(62조3000억원)을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중국은 국가 주도로 반도체산업 육성 정책을 강력히 펼치고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이후 중국은 10~30%에 불과한 반도체 자급률을 2025년 70%까지 높인다는 목표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60조원에 달하는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일명 대기금)을 필두로 각 지방정부, 국유기업, 민간기업이 수백조원을 쏟아붓고 있다.
반면, 한국은 별도의 반도체 보조금이 없다. 직접적인 보조금 대신 감세, 인프라 지원, 국가산업단지 조성 등 간접 지원에 치중하고 있다. 반도체 등 국가전략산업 분야에 설비 투자를 할 경우, 대기업 기준 15%인 세액공제 비율을 올해만 25%까지 공제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 전부다.
이에 반도체 업계에선 정부가 보조금 지급에 나설 것을 요청해 왔다. 경계현 삼성전자 반도체사업(DS) 부문장(사장) 등 반도체 기업인들은 지난달 26일 안덕근 산업부 장관과의 간담회에서 투자 보조금 신설을 공식 건의하기도 했다. 반도체 산업에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가는 만큼 보조금이 지급되면 원가 부담이 줄어 글로벌 경쟁력이 높아질 수 있다는 논리다.
한국 정부도 급변하는 세계 반도체 산업 지형의 변화에 적극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9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에서 주재한 '반도체 현안 점검회의'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반도체 경쟁은 산업 전쟁이자 국가 총력전"이라고 규정했다. 아울러 "전시 상황에 맞먹는 수준의 총력 대응 체계를 갖추기 위해 반도체 산업 유치를 위한 투자 인센티브부터 전면 재검토하겠다"며 "주요 국가의 투자 환경과 지원 제도를 종합적으로 비교 분석해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과감한 지원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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