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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T 38년] ① 시작은 미약했지만…끝은 ‘SK텔레콤’ [IT돋보기]


故 최종현 회장, 밀레니엄 꿈을 이루다

[아이뉴스24 김문기 기자] ‘수권자본금 5억원. 납입자본금 2억5천만원. 서울 구의동 광장전신전화국 청사 내 임주. 32명의 직원’

현재 이동통신 시장을 이끌고 있는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의 시작점이다. KT의 전신인 한국전기통신공사와 LG유플러스 전신 한국데이터통신과는 달리 초라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이동통신 시장을 호령하고 있는 기업으로 성장한 SK텔레콤은 1990년 고 최종현 SK 회장의 바람대로 국내뿐만 아니라 글로벌 시장을 무대로 뛸 수 있는 정보통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끄는 재목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난 3월 29일 38주년을 맞이하며 SK텔레콤은 과거를 딛고 새로운 혁신에 도전한다. ‘SKT 2.0’ 시대를 맞이해 새로운 변화를 꿈꾸고 있다. 지난해 11월 인적분할을 통해 SK스퀘어와 양분된 SK텔레콤은 유무선 통신 기반으로 진화를 이끌며 오는 2025년 매출 규모 23조원 이상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인공지능(AI) 서비스 컴퍼니’로 도약하겠다는 비전도 세웠다.

유영상 SK텔레콤 대표는 지난 3월 25일 SK텔레콤 주주총회 의장으로 참석해 혁신 기술 영역의 변화가 나타나는 시간이 기존 5년에서 단 5개월로 줄어들고 고객들이 새로운 서비스에 적응하는 데 걸리는 시간도 500일에서 1개월로 단축되는 ‘넥스트 노멀’ 시대가 도래했다"며 "선제적으로 준비한 역량을 바탕으로 견고한 성장을 이어가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SK텔레콤 내 ▲유무선 통신 ▲미디어 사업 ▲엔터프라이즈(Enterprise) 사업 ▲아이버스(AIVERSE) ▲커넥티드 인텔리전스(Connected intelligence) 등 5대 사업군을 중심으로 업(業)을 재정의하고, 3대 경영 요소인 ▲고객 ▲서비스 ▲기술에 최적의 인력과 자원을 배분해 수익성과 성장성을 증명하겠다고 밝혔다.

1984년 3월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새출발을 알렸다 [사진=SKT]
1984년 3월 한국이동통신서비스가 새출발을 알렸다 [사진=SKT]

◆ 시작은 미약했지만…이동통신 개척자 ‘우뚝’

1984년 3월부터 통신공사의 자회사로서 첫발을 내디딘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차량전화 및 무선호출서비스로 첫 업무를 시작했다.

카폰과 삐삐로 알려진 무선사업을 영위해온 한국이동통신서비스는 88서울올림픽을 앞둔 1988년 4월 공중전기사업자로 지정되면서 한단계 도약의 발판을 맞이했다. 사명도 한국이동통신으로 바꾸고, 독립사업자로 새출발에 나섰다. 또한 이 때 현재 쓰이고 있는 스마트폰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이동전화(휴대폰)이 첫 상용화됐다.

1990년을 전후해 통화품질 면에서도 획기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이동통신은 각종 장비 국산화와 운용 기술 자립을 이끌며 국내이동통신산업 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1991년 12월에는 이동통신 100만가입자를 돌파하면서 대중화 시대를 열었다.

1990년대로 진입하며 한국이동통신은 국내 통신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정부의 민영화 방침에 따라 한국이동통신은 1994년 1월 공개입찰을 거쳐 선경그룹에 인수, 민영화됐다. 선경그룹은 1980년대부터 오랜 기간 이동통신 사업을 준비했으며, 이미 확보한 사업권을 자진 반납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김영삼 정권 시절인 1994년 공개 입찰을 통해 한국이동통신 경영권을 확보했다.

제2이동통신사업자를 선정하기 위한 6개 그룹의 치열한 다툼이 지속됐다 [사진=SKT]
제2이동통신사업자를 선정하기 위한 6개 그룹의 치열한 다툼이 지속됐다 [사진=SKT]

◆ 10년의 노력, 시련의 연속

선경그룹의 한국이동통신 인수는 우연이 아닌 10년간의 노력에 따른 결과였다.

선경그룹은 故 최종현 회장의 확고한 의지 하에 1980년대부터 10여 년 간 이동통신 사업 진출에 매진해왔다. 최 회장은 1980년 11월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한 이후 다음 단계의 장기 경영목표를 정보통신사업 진출로 정하고, 2000년대 세계 일류의 정보통신기업’을 선경그룹의 새로운 비전으로 제시했다.

이에 따라, 1986년 미주 경영기획실에 텔레커뮤니케이션팀을 발족하고, 미국이 보유한 정보통신 관련 정보/기술을 습득케 했다. 또, 1989년 10월에는 미국 뉴저지 주에 현지법인 유크로닉스를, 1990년에는 선경정보시스템을, 1991년에는 선경텔레콤 등을 연이어 설립했다.

1992년 기회가 찾아왔다. 체신부(현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제2이동통신사 선정을 위한 공모에 나선 것. 체신부의 1, 2차에 걸친 심사 결과 선경그룹의 대한텔레콤(전 선경텔레콤)이 선두를 차지했다. 포철·코오롱·쌍용·동양·동부 등 6개 그룹이 치열한 각축전을 펼친 결과였다.

다만, 이같은 심사결과에 정치권이 시끄러웠다. 당시 여당이었던 민자당 김영삼 대표는 노태우 대통령과의 회동에서 심각한 우려를 전달하고 대국민 선언을 통해 공개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겠다고 말하는 등 선경그룹의 제2이동통신 사업권 획득에 강력히 반발했다.

결국 1992년 8월 20일 합법적인 절차와 공정한 경쟁을 거쳐 제2 이동통신 사업자로 선정됐던 선경그룹은 일주일 만인 27일 반대 여론을 감안해 사업권을 자진 반납하게 된다.

이와 관련, 선경그룹은 “국민들의 불신을 씻어내기 위해 사업권을 자진 반납하는 것이며, 오해 받을 우려가 없는 차기 정권에서 재참여, 실력으로 승부해 정당성을 인정받겠다”고 밝혔다. 체신부도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 문제를 차기 정권으로 이양한다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제2이동통신사업자 선정은 불과 1주일 만에 백지화됐다.

◆ 반대 성명 발표했던 정권 속에서 정당성 입증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후 정부는 제2이동통신 사업자 선정을 위해 전경련에 단일 컨소시엄 구성을 맡기고, 한국이동통신의 민영화도 동시에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제2 이동통신 사업자 선정 방법을 민간 자율에 의한 단일 컨소시엄 방식으로 확정, 컨소시엄 구성을 전경련이 결정하기로 했다. 한국통신이 보유한 한국이동통신 주식지분 64% 가운데 민간업체가 경영권을 획득하는 데 충분한 규모의 주식 54%를 매각하도록 했다.

당시 전경련 회장직을 맡고 있던 최종현 회장은 선경그룹이 제2이동통신 사업에 참여할 경우 공정성 시비가 일 수 있다며 1992년 사업권 반납 결정에 이어 다시 한번 불참을 결정했다. 대신 막대한 인수 자금이 들 것으로 예상되는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선경그룹은 1994년 1월 공개입찰을 통해 한국이동통신 주식을 확보하고 이동통신 사업 진출에 성공했다. 선경그룹은 가장 반대가 심했던 김영삼 후보가 대통령이 된 후 공개입찰을 통해 경영권을 인수, 정당성과 공정성을 획득했다.

공개입찰 방침이 발표된 이후 1주당 5만여 원에 불과하던 한국이동통신 주가가 50일 이상 상한가를 기록, 주당 30만 원 가까이 올랐다. 하지만 최종현 회장의 용단으로, 선경그룹은 시세보다 훨씬 비싼 주당 평균 33만 5천원의 가격으로 주식을 확보했다. 총 4천271억2천500만원 수준이다.

SK텔레콤은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라는 성과를 이룩했다 [사진=SKT]
SK텔레콤은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라는 성과를 이룩했다 [사진=SKT]

◆ ’SK텔레콤’ 새출발을 알리다

민영기업으로 새 출발한 한국이동통신은 1996년 1월, 세계최초로 CDMA 디지털 이동전화를 상용화하면서 세계 이동통신사에 한 획을 그었다. CDMA 방식은 이후 세계 표준으로 확산되면서 CDMA기술 종주국으로서 한국 이동통신의 위상은 더욱 강화됐다.

1997년 3월에는 SK텔레콤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이동통신 대표주자로 성장했다. 가입자 면에서도 세계적인 이동통신기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SK텔레콤은 1999년 7월 업계 최초로 신세대 전용 이동전화 브랜드인 ‘TTL’을 출시하면서 이동전화 서비스 마케팅의 신기원을 열었다. 또, 인터넷 PC통신을 연동한 다양한 부가 서비스 개발에 주력해 1997년 8월에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신개념의 PC통신 넷츠고(NETSGO) 서비스를 개시했다.

음성 위주에서 데이터 중심으로 이동통신이 진화하는 시대에 대비해 1999년 8월 무선으로 최고 114Kbps를 구현하는 IS-95B 서비스를 세계 최초로 제공하고 12월에는 무선 데이터서비스 엔탑(n.TOP)을 출시했다.

2000년 1월에는 이동환경하에서 국가간 IMT-2000 시험통화에 세계 최초로 성공을 거뒀다. 2000년 12월에는 최고 점수로 IMT-2000 비동기사업자로 선정된 가운데 2003년 12월부터 서울지역을 시작으로 상용서비스를 개시했다.

2000년 10월에는 세계 최초로 CDMA2000 1X 상용서비스 개시, 2002년 1월에는 동기식 IMT-2000 (CDMA2000 1X EV-DO) 상용서비스도 개시했다. 같은해 11월에는 CDMA2000 1X EV-DO 망을 통한 멀티미디어 서비스인 ‘준(June)’을 제공하면서 유무선 멀티 미디어서비스를 강화했다. 유무선 통합 인터넷 서비스인 네이트(NATE)도 이 때 탄생했다.

/김문기 기자(mo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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