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과학] 한국 핵물리학의 꿈 '라온(RAON)', 어디까지 왔나?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시설 전경 [사진=IBS]

[아이뉴스24 최상국 기자] 2011년 12월부터 10년간 1조5천억원을 투입한 '한국형 중이온가속기(RAON) 건설구축사업'의 1단계 사업기간이 지난해 말 종료됐다. 하지만 10년 동안 네 차례의 계획변경을 거치면서 사업목표를 줄이고 줄여 지난해 5월 최종적으로 제시했던 목표마저 달성하지 못한 채 해를 넘기면서 이 사업이 당초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기초과학연구원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RISP)은 지난 12월 28일 "대전 유성구 신동지구에 구축 중인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의 저에너지구간 초전도가속장치 설치를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다만 12월말을 목표시점으로 잡았던 '최초 빔 인출'은 "22년 10월 이전에는 가능할 예정"이며 "희귀동위원소 생성장치를 이용한 안정적인 빔을 연구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24년 말부터"라는 변경된 일정도 함께 제시했다. 라온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래 공식적으로 다섯 번 째 일정을 연기하게 된 셈이다.

과기정통부와 사업단은 '저에너지구간 초전도가속장치 설치 완료'에 대해 "초전도가속장치 제작과 성능 확보 과정을 순수 국내 기술력만으로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는 것에 의미가 있으며, 이는 세계 8번째로 이룬 쾌거"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국내에서 처음 시도하는 초전도가속장치 제작과정의 기술적 어려움 등으로 일정은 당초 계획보다 지연되었다"고 아쉬움을 표시하면서도 "이 과정에서 소중한 기술과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다"고 위안했다.

이석래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조성추진단장은 “국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대형연구시설 구축사업으로 난항도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노력하여 지금의 성과를 이룬 연구진에게 감사드린다"며 "향후 더 복잡하고 더 어려운 고에너지 가속장치에 대한 연구 결과와 저에너지 구간의 안정적 운영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고에너지 구간 추진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반면 대다수 언론은 '저에너지구간 초전도가속장치 설치 완료' 사실보다는 "다섯 번 째 연기", "또 다시 연기", "반쪽 사업으로 전락" 등의 표현으로 일정지연에 대한 질책과 우려 섞인 보도를 쏟아냈다.

중이온가속기 구축사업의 전체 그림 속에서 '저에너지구간 초전도가속장치 설치 완료'는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왜 이 사업은 목표와 일정 변경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걸까? '단군 이래 최대 기초과학 프로젝트'라는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구축사업은 과연 끝까지 마무리될 수 있을까?

◆'라온(RAON), 세계 최초, 최고 성능의 희귀동위원소 실험시설을 꿈꾸다

중이온가속기는 양성자에서 우라늄까지 다양한 중이온을 생성·가속해 물질(표적)의 핵을 변화시켜 희귀동위원소를 만들어내는 장치다. 희귀동위원소 빔을 이용한 다양한 핵물리 실험에 활용된다.[사진=IBS]

라온(RAON, Rare Isotope Accelerator complex for ON-line experiments)은 말 그대로 희귀동위원소 생성 실험장치다. 포항에서 운영되고 있고 청주에 새로 지을 예정인 방사광가속기는 전자를 빛의 속도로 가속시켜 나오는 매우 밝은 빛을 이용해, 연구하고자 하는 물질의 미세한 구조를 들여다보기 위한 시설이다. 상대적으로 잘 알려진 만큼 이용수요도 많은 편이다. 반면 중이온가속기는 연구하려는 물질 자체를 가속시켜 연구하는 장치다. 연구하려는 물질은 희귀동위원소다. 자연에서 쉽게 발견하기 어렵거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동위원소들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내고 이를 빔으로 받아 원소의 생성과 반응, 변화에 대한 근본적인 지식을 발견하려는 첨단기초과학연구시설이다. 방사광가속기처럼 많은 이용자가 있지는 않지만 핵물리학자들에게는 꿈의 실험실이다.

라온(RAON)에 '한국형'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세계적으로 현재까지 지어졌거나 짓고 있는 중이온가속기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능을 구현하기 위해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새로운 개념, 최고 성능을 목표로 가속기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은 세계 최초로 융합형 희귀동위원소 생성방식(ISOL+IF)으로 구축되고 있다.[사진=IBS]

중이온가속기는 크게 희귀동위원소를 만들어내는 장치, 이를 가속시키는 장치, 이를 들여다보는 장치로 구성되는데, 희귀동위원소를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방식에 따라 두 가지로 구분된다. 가벼운 이온(양성자)을 가속해 무거운 표적(예:우라늄)에 충돌시켜 희귀동위원소를 생성하는 방식(ISOL)과, 반대로 무거운 이온(중이온)을 가벼운 표적(예:탄소)에 충돌시키는 방식(IF)이다.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은 이 두 가지 방식을 하나의 빔라인으로 연결하는 새로운 방식(ISOL+IF)으로 추진됐다. ISOL방식으로 생성된 희귀동위원소 빔 그 자체를 활용해 연구하면서도, 그렇게 생성된 희귀동위원소 빔을 더욱 높은 에너지로 가속시켜 IF방식의 중이온 빔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희귀동위원소를 실은 빔을 표적과 충돌시키면 더욱 더 희귀한 동위원소가 생성될 수 있다는 개념이다.

결국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이 "세계 최고 성능(200MeV/u, 400kW급, 우라늄 기준으로 광속의 0.5배까지 가속), 세계 최초 방식(ISOL+IF)으로 가장 다양한 종류의 희귀동위원소를 만들어낸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초전도 선형가속기의 고에너지구간 설치까지 완료하고 ISOL방식과 IF방식을 한 라인으로 연결하는 것이 필수인 셈이다. 지금까지 완공된 '양성자가속기(사이클로트론)→희귀동위원소 생성분리장치(ISOL)→입사기→초전도 선형가속기(저에너지구간)'까지의 라인에서는 18.5MeV/u(핵자당 에너지단위)가 가속할 수 있는 최대 에너지다.

중이온가속기 장치 구성(빔흐름). SCL3가 저에너지구간, SCL2가 고에너지구간이다. [사진=IBS]

중이온 빔을 이용한 실험도 저에너지구간 가속기 앞단의 MMS(질량측정장치), CLS(동축레이저분광장치), 가속기 뒷단의 KoBRA(되튐분광장치), NDPS(핵데이터생산장치) 등을 이용한 실험은 빔인출이 시작되면 할 수 있지만, IF방식의 희귀동위원소 생성은 물론 LAMPS(대수용다목적핵분광장치), μSR(뮤온스핀완화기), BIS(의생명 빔 조사장치) 등 고에너지 실험장치의 이용은 고에너지구간 초전도 가속장치가 완공되는 2028년 이후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됐다.

◆"최초 빔 인출은 22년 10월, 실험용 빔 제공은 24년 말 목표"

권영관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 부단장이 중이온가속기 저에너지구간의 초전도가속장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최상국 기자]

과기부가 중이온가속기구축사업을 일괄구축에서 단계구축으로 변경한 것은 지난해 5월이다. 사업기간(2021년말)내에 가속기 구축을 완료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사업기간 내에 할 수 있는 것까지를 '1단계 사업'으로 정하고 이후 2년간의 선행연구개발을 통해 기술적 문제를 해결한 뒤 나머지 구간의 건설을 '2단계 사업'으로 진행키로 한 것이다.

이 때 1단계 사업으로는 "기술이 확보된 저에너지구간을 중심으로 우선 구축, 시운전∙빔인출에 집중, 입사기→저에너지구간 초전도 가속기 연계 빔시운전 및 2021년 내 최초 빔인출"을 목표로 정했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이같은 목표도 힘들다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노도영 IBS 원장은 11월16일 IBS 10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최초 빔인출이 6개월 가량 더 늦어질 것 같다고 전하면서 그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요점은 "제작된 초전도 가속관을 설치하고 테스트하고 있는데 제대로 성능이 나오지 않아 구축 일정이 지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가속관 모듈의 설치는 연내에 전부 끝낼 수 있을 것 같지만 시운전을 통해 성능을 확보하기까지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그 과정에는 '극저온 냉각'이라는 큰 산이 또 버티고 있다. 거기서 돌발변수가 생기면 더 오래 걸릴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라온의 저에너지구간 선형가속기에는 2가지 종류(QWR, HWR) 총 126개의 가속관이 들어간다. 모듈 단위로는 54기다. 가속관은 저온초전도체인 니오븀(Nb)으로 만들어지는데 절대온도 2도(영하 271℃)의 극저온을 유지해야 한다. 이를 위해 헬륨 가스를 액화하고 이를 각 가속관의 냉매로 공급하는 극저온 플랜트가 가속장치 옆 건물에 설치돼 있다. 액체헬륨 냉각은 그리 어려운 기술은 아니지만 가속기 같이 큰 규모의 냉각장치는 프랑스 A기업이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어 그에 따른 리스크는 지적돼 왔던 부분이다.

중이온가속기사업단 연구원들이 HWR-A형 초전도가속관 모듈 13번(마지막) 설치작업을 하고 있다.(2021년 5월)[사진=IBS]

노 원장의 우려는 며칠 지나지 않아 바로 현실이 됐다. 액체헬륨을 가속관으로 보내는 냉각장치 시운전 도중에 액체헬륨 압축기의 오일이 섞여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일정은 6개월 연기에서 10개월 연기로 또 늘어나게 됐다.

지난 10일 중이온가속기 구축현장에서 만난 권영관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 부단장은 "워낙 경험이 많은 회사라 문제는 해결하겠지만 또다시 약속한 일정을 지키지 못하게 됐다"고 아쉬움을 표하면서도 "공식적으로는 최초 빔인출 시점을 10월로 발표하긴 했지만 내부적으로는 6월까지 해낸다는 목표를 아직 버리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약속한 일정을 늘 지키지 못한 미안함에 한 번이라도 일정을 앞당겨 완성하는 사례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중이온가속기 고에너지구간 초전도 가속장치의 길이는 저에너지구간보다 3배 정도 긴 300미터에 이른다. 지금은 초전도가속관 설치를 위한 기본적인 배관공사만 이루어져 있는 상태다.[사진=최상국 기자]

◆"누구도 해 본 적 없는 초고난이도 프로젝트, 성공하면 한국 기초과학의 새 이정표"

과기부와 사업단은 저에너지구간에서 할 수 있는 주요 연구 분야로 우주원소의 기원, 새로운 핵의 상태, 핵에서 양자색역학 화석 찾기, 미니 중성자별 생성, 중성자별 합침과 중력파, 강한 상호작용 물질의 상전이현상, 초중핵 안정 원소 탐색, 별들의 진화와 폭발, 안전한 차세대 핵에너지 개발, 암흑물질 탐구, 우주탄생의 비밀, 감마선폭발의 기원, 핵융합 및 폐기물처리 등을 열거했다.

핵도표로 나타낸 중이온가속기 활용 연구 영역. 세로축이 양성자수, 가로축이 중성자수이다. 양성자수(원자번호)는 같지만 중성자수가 다른 핵종을 동위원소라고 한다. [사진=IBS]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형 중이온가속기가 세계 최고, 세계 최초의 희귀동위원소 실험장치로 우뚝서기 위해서는 2단계로 미뤄놓은 고에너지구간 초전도 가속장치가 완성돼야 한다. 이미 한 번의 재검토 과정에서 처음 계획했던 3기의 가속기(SCL 1,2,3) 중에 1기(SCL1)를 예산절감을 이유로 없앴기 때문에 현재 상태는 최초 계획에 비하면 반쪽이 아니라 3분의 1쪽에 불과한 상태다. 이 때문에 과기부나 사업단 모두 당연히 2단계 사업을 진행할 것으로 자신하고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사업기간이 종료됐기 때문에 사업추진여부는 알 수 없는 상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대선공약으로 시작된 사업이라 예비타당성조사는 면제된 사업이다. 하지만 2단계 사업을 위해서는 기재부의 적정성 재검토를 한 번 더 거쳐야 한다. 사업단 측에서 제기한 추가 예산 소요는 약 1천400억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가속기 커뮤니티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중이온가속기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한 경험이 있는 세 명의 가속기 연구자들에게 후속사업 진행방향에 대한 의견을 구했더니 모두 다른 대답이 돌아왔다.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 접어야 한다"는 의견에서부터 "고에너지구간은 설계부터 다시 해야 한다"는 의견, "늦더라도 당초 계획했던 시설을 완공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다양하다.

지난해 2월 열렸던 중이온가속기 토론회에서 단계를 구분하지 말고 일괄구축으로 완공하자는 의견을 피력했던 홍병식 고려대 교수(중이온가속기이용자협회장)는 "이용자 입장에서 저에너지구간과 고에너지구간을 함께 완공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면서도 "아쉽기는 하지만 저에너지구간 실험시설을 활용하면서 추후 고에너지구간 완공에 대비한 다양한 검출기 개발연구도 병행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우리와 비슷한 일정으로 진행돼 온 독일 중이온연구소의 FAIR 가속기도 2025년 이후로 완공을 연기했고, 프랑스의 가닐(GANIL)도 상당히 연기될 것으로 알려져 라온 측으로서는 시간을 번 셈"이라고 말했다.

출연연에서 가속기 연구를 하다가 최근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한 연구자는 "중이온가속기 사업이 이렇게 어려워진 것은 애당초 너무 무리한 목표를 세웠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아무도 해 보지 않은 일을 시작한 것인데 아파트 짓는 것처럼 납기를 맞추라고 할 수는 없다. 저에너지구간에서도 할 수 있는 실험이 많이 있는 만큼 앞으로 남은 구간은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차근차근 검증해 나가면서 완성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고에너지구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까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고에너지구간까지 가야 세계적인 수준의 희귀동위원소 생성 가속기가 된다. 늦더라도 끝까지 해내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노도영 IBS 원장은 올해 신년사에서 "중이온가속기구축사업은 수차례 기간 연장에도 불구하고 기한 내 최종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고 아직도 빔 인출을 위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작년 말 저에너지구간 가속장치 완성, ISOL의 성공적 시험가동 등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중이온가속기 사업단이 빔인출 단계마다 나타나는 기술적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걸음씩 나갈 수 있도록 모두가 격려하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기술적으로 매우 고난도의 도전적 과업이지만 우리나라 기초과학에 꼭 필요한 시설이므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설정한 목표대로 완성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중이온가속기 구축사업은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조성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근거하고 있다.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서는 관련 거버넌스도 손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은 구축사업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가속기 운영 중심의 '중이온가속기연구소'로 이름이 바뀌고 IBS 내부연구소로 조직이 개편될 전망이다. 국제과학벨트법에 따른 사무기구인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조성추진단'은 과기정통부 소속의 외부 임시조직으로 운영돼 왔는데 역시 사업기간 종료와 함께 향방이 묘연한 상황이다. 이석래 단장은 행안부와 협의해 일단 6개월 더 존속키로 했다고 전했다. 대선이후 정부조직개편과 맞물려 추진단의 행보도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최상국 기자(skchoi@inews24.com)







포토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