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은 분명 축복이지만 모든 이에게 그런 것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임신과 출산으로 인해 늘어나는 부담을 버거워하는 여성과 부양 의무와 상속자 증가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남성들은 늘 있었기에 사람들은 예부터 다양한 피임법을 개발해냈다.
피임(避妊)이란 '임신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피하는 방법'을 뜻한다. 한 생명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여성의 난자와 남성의 정자가 만나서 수정란을 이루고, 이 수정란이 모체의 자궁벽에 착상해 자라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의학적으로 임신은 수정란이 자궁벽에 착상하는 순간부터라고 하니, 임신을 피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 전까지의 과정에 개입해야 한다. 즉 피임은 난자와 정자가 만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거나, 수정란이 자궁벽에 착상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기원전에 쓰인 고대 이집트의 파피루스 문서에서도 성교 후 아교나 꿀, 악어 배설물과 같은 물질을 일종의 살정제(殺精劑)로 이용해 여성의 체내에 넣어 임신을 막으려 했다는 기록과 가축의 방광 등의 내장을 가공해 원시적 형태의 콘돔을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피임법의 역사는 길다.
피임약과 살정제는 난자와 정자의 생성과 생존을 막고, 콘돔과 페미돔, 페서리 등은 난자와 정자의 만남을 물리적으로 차단하며, 루프는 생성된 수정란이 자궁벽에 착상하는 것을 방해하여 피임 효과를 나타낸다. 따라서 이 단계를 넘어가는 경우, 즉 이미 자궁에 착상된 태아에 대해 시도되는 낙태는 엄밀히 말하자면 피임의 방법이 될 수 없다. 피임이란 말 그대로 임신을 피하는 것이지, 이미 시작된 임신을 중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본다면 난관과 정관을 절제하는 영구피임술 역시 임신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차단한다는 점에서 피임법이라기보다는 '단산법'에 가깝다.
현재 인류가 개발한 다양한 피임법 중에서 가장 효과 있으면서도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을 꼽으라면 단연 피임약일 것이다. 피임약의 원리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배란의 원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여성의 몸에서 일어나는 배란은 마치 호르몬들의 정교한 오케스트라 연주와 같다. 배란이 정상적으로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호르몬들의 조절이 필요한데, 그중에서도 에스트로겐(Estrogen), 프로게스테론(Progesteron)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일반적으로 배란기에는 에스트로겐의 농도가 증가하고 배란 이후에는 프로게스테론의 농도가 높아졌다가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하지 못하면 이들의 농도는 최저로 떨어지고 월경이 일어난다. 이처럼 여성의 배란 주기에 다양한 호르몬이 작용한다는 사실은 이미 20세기 초에 알려졌다. 1919년 쉐링사는 토끼를 이용한 실험을 통해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을 주입하면 배란이 억제되는 현상을 관찰해 보고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호르몬들을 어떻게 이용하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이들을 이용하려는 시도는 30여 년이나 지나 이루어졌다. 당시의 사회적 기준으로는 공공연하게 임신과 출산을 거부하는 것이 죄악시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빈민가에서 간호사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다산(多産)이 빈민층의 모자사망율을 높인다는 것을 깨달은 산아제한운동가 마거릿 생어는 1916년 미국 브루클린에 산아제한진료소를 열었다가 공안질서 방해죄로 감화원에 수감된 적도 있었다.
본격적인 피임약 개발은 온갖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수태하지 않을 권리'를 위해 꾸준히 노력해 온 마거릿 생어가 1952년 내분비학자 그레고리 핀커스 박사에게 자금을 지원하면서 비로소 시작된다.
그 결과 1960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은 최초의 경구용 피임약(에노비드)이 개발됐다. 이후 경구 피임약 개발은 다각도로 이루어져 지난 50년간 꾸준한 개량을 거듭해 그 효능과 안전성이 어느 정도 검증됐고 부작용 역시 줄어드는 방향으로 개선됐다. 최근에는 초기 피임약에 비해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테론의 함량을 줄여 부작용을 줄인 피임약(마이보라, 머쉬론 등)과 프로게스테론 하나만을 이용해 여성의 몸에 주는 부담감을 낮춘 피임약(미니필), 여드름을 개선시켜 주는 복합 기능을 가진 피임약(다이안느) 등 다양한 종류의 피임약이 개발돼 여성들의 선택권을 늘려주고 있다.
흔히 사후피임약으로 불리는 응급피임약도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개발됐다. 1980년대, 사전에 피임약을 복용하지 못했을 경우 성관계 직후 고농도의 여성호르몬 제제를 복용해 수정란의 착상을 방지하는 'Yuzpe Method' 방법이 제시됐다. 이를 토대로 응급 피임약(노레보)이 개발됐다. 응급피임약은 프로게스테론의 일종인 레보노르게스텔이 고농도로 함유돼 있다. 원래 프로게스테론은 자궁내막을 두텁게 하는 호르몬으로, 배란 이후 분비량이 증가해 약 2주간 유지되다가 임신이 되지 않으면 급격히 떨어지고, 이것을 신호로 자궁내막이 떨어지며 월경이 발생한다. 응급피임약은 체내의 프로게스테론의 농도 변호가 자궁내막을 탈락시키는 원리를 이용해 수정란의 착상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응급피임약은 고농도의 호르몬 함유로 여성의 몸에 주어지는 부담감이 큰 제품이다. 어디까지나 '응급' 상황에 대한 일시적 조치일 뿐이어서 보통의 피임약에 비해 피임 효과가 떨어지며 자주 사용할수록 효과는 더욱 떨어진다.
경구피임약은 피임 효과가 확실하지만 성관계를 하지 않아도 매일 같은 시간에 챙겨 먹어야 한다는 번거로움이 있는 반면, 응급피임약은 한 번만 복용해도 되고 실제 관계 후에만 먹으니 복용 방법이 편리하다. 하지만 피임 실패율이 상대적으로 높고(성관계 후 24시간 내 복용하면 실패율이 5%지만 48시간 이내엔 15%, 72시간 이내엔 42%로 피임 실패율이 급격히 높아지며 72시간 이후에는 복용에 큰 의미가 없다), 함유된 호르몬의 양이 경구피임약의 4~6배 정도 높아 여성의 몸에 좀 더 무리를 준다는 취약점이 있다. 양쪽 다 원치 않는 임신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이기에 선택은 개인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는 사전대비(事前對備)의 관점에서, 하나는 사후대처(事後對處)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는 차이를 분명히 인식한 뒤 선택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글 이은희 과학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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