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권서아 기자] 전차와 자주포, 전투기까지 국산 무기의 영역은 넓어졌지만 여전히 해외에 맡기고 있는 분야가 있습니다. 무기체계의 연산과 제어, 신호처리를 담당하는 '국방반도체'입니다.
팹리스 업계에 정통한 한 관계자가 최근 관련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줄곧 강조해온 분야도 국방반도체였습니다. 요즘 팹리스 업계의 화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도 '피지컬 AI와 국방'을 꼽았습니다.

이 관계자는 지난 6월 "가장 깊이 보고 있는 게 국방반도체"라며 "99% 이상을 수입하고 있어 빨리 국산화가 필요한 부분"이라고 했습니다. 최근에도 "민간에서 개발한 칩들이 국방산업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여기서 팹리스는 자체 생산공장 없이 반도체 설계를 전문으로 하는 기업을 말합니다. 국내에서는 리벨리온·퓨리오사AI·딥엑스 등 AI 반도체 업체들이 대표적입니다. 팹리스가 설계한 칩은 삼성전자나 대만 TSMC 같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업체)가 대신 생산합니다.
실제로 방위사업청이 2023년 레이더와 유도무기, 군 통신체계 등 54개 주요 무기체계에 쓰인 반도체 6945개를 조사한 결과 해외에서 설계·제조된 제품 비중은 98.9%에 달했습니다. 방사청은 이 결과를 2024년 11월 '국방반도체 발전전략'을 발표하면서 공개했습니다.
국방반도체는 쓰임에 따라 크게 7개 유형으로 나뉩니다. 방위사업청은 레이더와 통신 장비에 쓰이는 고출력 RF(무선 신호를 강하게 보내는 반도체), AI·신호처리 반도체, 우주·항공용 반도체, 센서와 전원 반도체 등을 주요 유형으로 제시했습니다. AI·신호처리 분야에는 FPGA(용도에 따라 기능을 바꿔 쓸 수 있는 반도체)와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이 포함됩니다.
이들 분야는 해외 업체가 강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FPGA는 AMD 자일링스와 알테라, 아날로그·신호처리 반도체는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와 아날로그디바이시스(ADI) 등이 대표적입니다. 엔비디아의 GPU도 레이더와 센서 신호처리 등 국방·항공우주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미중 갈등이나 대만해협 긴장처럼 국제 정세가 흔들릴 때입니다. 방위사업청도 이를 국방반도체 공급 불안 요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무기체계는 한번 개발하면 20~30년 이상 운용되는 경우가 많아 같은 반도체를 장기간 조달해야 합니다. 특정 칩이 단종되거나 수출통제에 걸리면 대체품을 다시 검증해야 해 생산과 정비 일정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수출이 늘수록 부담도 더 커질 수 있습니다. 미국산 반도체나 기술이 수출통제 대상에 해당하면 이를 적용한 무기를 제3국에 수출할 때도 해당 규정을 따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효승 한국시스템반도체협동조합 이사장도 지난 2월 전자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위험을 짚었습니다. 그는 미국산 반도체의 수출통제로 공급이 끊기면 전차와 자주포, 미사일, 전투기, 함정 등의 수출과 자급화가 동시에 제약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국방반도체의 중요성은 AI 확산과 함께 더 커지고 있습니다. 드론과 유·무인 복합체계, 감시·정찰, 자율제어 등은 센서로 수집한 데이터를 현장에서 빠르게 처리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전장이 AI와 무인화 중심으로 바뀔수록 이를 구현할 반도체의 역할도 커지는 셈입니다.

산업계도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삼성전자는 지난해 AI·RF용 국방반도체 개발과 생산을 위한 협약을 맺었습니다. 향후 개발한 AI 반도체를 AI 파일럿과 무인기 등 유·무인 복합체계에 적용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팹리스 업계가 국방을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국내 업체가 칩을 개발하더라도 국방 시장에서는 실제 무기체계에 들어가 신뢰성을 검증받은 이력이 중요합니다. 검증 실적이 없으니 외산을 쓰고, 외산을 쓰니 다시 국산 칩이 실적을 쌓기 어려운 구조가 반복돼 왔다는 게 업계의 지적입니다.
이효승 이사장은 국방반도체를 국내 팹리스 산업을 키울 '마중물'로 표현했습니다. 안정적인 국방 수요와 실전 검증 시장이 만들어지면 국내 기업이 기술과 인력, 양산·검증 경험을 축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정부도 오는 12월 국방반도체법 시행을 앞두고 연구개발(R&D)과 시험·인증, 실제 무기체계 적용으로 이어지는 산업 기반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방사청도 지난 3일 산·학·연 관계자 200여명을 모아 국방반도체 정책·과제수요조사 설명회를 열었습니다. 이달 30일까지는 신규개발과 국산화, 상용 반도체의 국방 전환 기술을 제안받아 연말까지 '100대 국방반도체 핵심과제' 로드맵을 마련할 계획입니다.
정부가 편성한 내년도 국방예산(정부안)도 73조2777억원으로 올해보다 8.2% 늘었습니다. 무기체계 개발·도입에 쓰이는 방위력개선비는 13.8% 증가했고, 무기체계 예산만 보면 증가율이 15.2%에 달합니다. 국방 AI와 반도체 연구개발 투자도 확대됩니다.
K방산이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키운 것처럼, 이제는 무기체계 안에 들어가는 국방반도체도 국산화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권서아 기자(seoahkwon@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