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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내린 19대 국회, 여의도 그때 그 사건


[19대 국회 결산]② 파란만장했던 4년, 여도 야도 계파 갈등

[윤미숙기자] 2012년 5월, 당시 갓 문을 연 19대 국회는 이른바 '국회선진화법'으로 불리는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다수당의 법안 날치기와 소수당의 물리적 저지, 그에 따른 국회 폭력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국회 차원의 노력이었다.

국회선진화법이 적용된 지난 4년 국회에서 '폭력'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한 법안을 처리하기 위해 전혀 관계없는 법안을 연계하는 '거래'가 횡행하거나 여야 합의가 이뤄지지 않을 경우 쟁점법안으로 분류된 법안은 사실상 처리가 불가능해지는 부작용도 발생했지만, 이 법이 국회를 대화와 타협으로 이끌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국회선진화법은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 의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라는 진풍경도 연출했다. 지난 2월 야당 소속 의원 38명은 정부 여당이 추진하는 테러방지법에 반대, 9일 간 192시간 넘게 필리버스터를 진행했다. 전 세계 최장 기록을 경신한 당시 필리버스터는 국내 뿐 아니라 외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밖에도 19대 국회는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유출 논란, 세월호 참사, 통합진보당 해산 등 각종 사건 사고로 뒤덮였다. 각 당 내부적으로도 분열 또는 통합을 거듭하며 파란만장한 4년을 보낸 점도 정치권 안팎의 이목을 끈다.

◆'박이 뭐길래'…與 친박·비박 갈등 끝 분당 위기설까지

2012년 12월 19일. 새누리당은 박근혜 대통령을 당선시키며 정권 재창출에 성공, 집권 여당으로서 정국을 주도했다. 그러나 안으로는 계파 갈등이 끊이지 않으면서 줄곧 파열음을 노출했다.

19대 총선을 거치며 당내 최대 계파가 된 친박계는 당권을 장악하며 박 대통령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즉 비박계와 대립해 왔다. 여기에는 김무성 전 대표, 유승민·진영 의원과 같이 원래 친박계였으나 박 대통령과 각을 세운 사람들도 포함됐다.

박근혜 정부의 대표적 치적으로 꼽히는 공무원연금 개혁 과정에서 당시 유승민 원내대표가 국회의 행정입법 수정·변경 권한 강화를 골자로 한 국회법 개정 요구를 수용했다가 '배신의 정치'로 낙인찍힌 점이 대표적 사례다.

그 여파는 20대 총선 공천까지 이어졌다. '비박 학살'이라는 오명 속 유 의원을 비롯한 친유승민계 의원들은 대거 공천에서 탈락했다. 계파 갈등에 매몰돼 민생을 외면한 집권 여당 새누리당은 그렇게 총선에서 참패했다.

그럼에도 새누리당은 총선 직후 또 한 번 찢어졌다. 당을 수습하겠다며 마련한 비대위·혁신위 체제를 친박계가 '비박 중심 인선'이라는 이유로 비토한 것이다. 비박계에선 "양아치" "친박이 아닌 매박"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일각에서는 비박계가 당을 쪼개고 나오면서 여권발(發) 정계개편에 시동이 걸릴 것이란 관측까지 나오는 상태다.

◆'안철수 기준으로 헤쳐모여' 통합 분열 반복한 野

야권 역시 2012년 대선 전 등판한 '안철수'를 중심으로 통합과 분열을 반복하며 굴곡진 역사를 썼다.

대선 당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에게 야권 단일 후보 자리를 양보한 안철수 후보는 2013년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신당 창당을 추진하다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한길 대표의 민주통합당과 손잡고 제3지대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초기 새정치민주연합은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가 이끌었으나 같은 해 7월 치러진 재·보궐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두 공동대표를 비롯한 지도부가 총사퇴한 뒤 새정치민주연합은 비대위를 거쳐 2015년 초 문재인 대표 체제를 맞았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은 4월 재·보궐 선거에서 또 한 번 참패했고, 비주류를 중심으로 문 대표를 비롯한 주류 책임론이 불거지면서 내홍에 휩싸였다. 이 과정에서 문 대표는 혁신위를 구성하기로 결정, 안 전 대표에게 위원장직을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이후 문 대표와 안 전 대표는 당 혁신 방안을 놓고 대립하며 갈등을 이어갔고 감정의 골마저 깊어졌다. 결국 안 전 대표는 총선을 다섯 달 앞둔 지난해 말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데 이어 올해 초 탈당파 의원들과 함께 국민의당을 창당했다. 그 사이 새정치민주연합은 안 전 대표의 상징과도 같은 '새정치'를 뺀 더불어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꿨다.

다만 더민주와 국민의당의 성적표는 새누리당과 달랐다. 당초 새누리당의 승리가 예상됐던 총선에서 더민주는 123석을 차지해 원내 1당 자리에 올랐고 국민의당은 호남을 석권하며 원내 제3당 지위에 올랐다. 이는 민심이 정부 여당의 실정을 심판함과 동시에 야권에도 경고장을 준 것이란 평가가 나왔다.

◆진보정당 수난시대…사상 초유 정당 해산

진보정당에게는 19대 국회가 수난시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통합연대가 통합진보당으로 재탄생, 19대 총선에서 진보정당 역사상 최다 의석인 13석을 기록하며 돌풍을 일으켰지만 곧바로 비례대표 부정 경선 의혹이 불거지면서 내홍이 불거졌다.

결정적 위기는 이석기 의원이 이른바 '지하혁명조직(RO)' 회합을 주도하며 국가기간시설 타격 등 내란을 음모했다는 주장이 불거진 것이었다. 당시 대법원은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지만 법무부가 통합진보당을 '위헌 정당'으로 규정, 헌법재판소에 해산 심판을 청구했다.

결국 통합진보당은 2014년 말 헌법재판소의 해산 결정에 따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당시 통합진보당 소속이었던 국회의원 5명 모두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윤미숙기자 come2ms@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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