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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일의 릴레이 인터뷰] 박윤민 디스플레이테크 사장


 

안녕하세요,김광일의 릴레이인터뷰코너입니다. 최근 코스닥입성에 성공한 티엘아이 김달수 사장의 성공이야기는 벤처사업 역시 자신이 가장 잘아는 분야에서 한 우물을 파야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준 인터뷰였습니다.

주위 돈이란 돈은 다끌어다 쓰고, 예상치 못한 실패,그리고 새로운 사업아이템 발굴에 이르는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극복하며 오뚜기처럼 회생한 김달수 사장의 창업기 역시 코아로직 황기수 사장과 함께 벤처 성공모델로 평가받기에 손색이 없는 듯합니다.

주인공은 국내 휴대폰용 LCD모듈 1위 회사인 디스플레이테크 박윤민 사장입니다. 김 사장은 박 사장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벤처창업의 정통을 보여주는 CEO입니다. 특정분야에 승부를 걸어 세계적 수준의 기업으로 발돋음한 뚝심의 기업가입니다."

두 사람은 모 대학 최고경영자과정을 통해 알게된 사이라고 합니다. 서로 다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두 사람은 독보적인 기술력과 왠만한 굴곡에는 굴하지 않는 강단있는 CEO라는 점에서 매우 닮은 듯합니다.

디스플레이테크 박윤민(45)사장이 어떤 면에서 벤처창업의 정통을 보여주는 창업가인지, 그의 9년에 걸친 사업이야기를 소개합니다.

휴대폰, DMB, PMP 등 휴대용 정보기기에 들어가는 디스플레이모듈 한 분야에서 연매출 1천700억원대의 규모를 보이며 세계적 전문기업으로 발돋음한 벤처기업이 등장, 화제다.

디스플레이테크는 삼성SDI등 재벌대기업을 제외하곤 디스플레이모듈시장에서 '넘버1'을 고수하고 있는 기술전문 벤처기업이다.

경기 안성시 안성제1산업단지초입에 위치한 디스플레이테크는 대기업공장을 연상케할만큼 웅장한 규모를 자랑한다. 입구부터 몇 겹의 철벽 보안시스템은 최첨단 기술을 보유한 대기업와 흡사한 분위기다.

박윤민 사장은 훤칠한 키에 호남형이다. 반듯한 스타일과 다소 느린듯하면서도 논리정연한 화술은 9년차 CEO로써의 노련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해보인다.

박윤민 사장은 전형적인 엔지니어출신 창업가다. 하지만 엔지니어출신답지 않게 기업가로써 매우 절제되고 신중한 느낌을 준다.

아마도 제조업기반의 벤처기업을 창업, 9년만에 연매출 1천700억원대, 직원 1천000명대인 규모의 경제를 넘어선 중견기업 CEO로서 터득한 경영수완때문인 듯했다.

실제 박 사장은 시장상황과 글로벌 경쟁환경, 그리고 제조업기반 벤처기업이가야할 방향에 대해 아주 명쾌하고 확신에 찬 메시지를 쏟아낸다.

특히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글로벌기업을 주고객으로 확보하고 있는 디스플레이테크의 향후 경쟁력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넘쳐난다.

한국전자, 오리온전기를 거친 박 사장은 IMF사태로 구조조정돼 거리로 내몰린 끝에 창업에 나서 성공반열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98년 창업한 디스플레이테크는 휴대폰 등에 소요되는 LCD모듈만을 전문적으로 개발, 삼성전자, 모토로라등에 납품, 연간 1천700억원대 매출규모를 보이고 있는 기술력있는 벤처기업.

◆ 직장은 해방구, 반도체 개별소자를 아세요?

88년 9월, 대학 마지막 학기 중간에 우연히 치른 입사시험. 한국전자로부터 합격통지서를 받고 고민에 빠져 있던 박윤민은 입사를 결심한다.

12월부터 시작되는 삼성, LG 등 대기업 공채를 포기하고 서둘러 한국전자를 택한 것은 지긋지긋한 '가난'때문.

군제대후 2학년에 복학한 그의 캠퍼스생활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한 전쟁이었다. 가정형편상 생활비는 물론 학비까지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3년내내 캠퍼스내 도서관경비와 자판기 관리등 교내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고, 학비는 은행융자로 겨우겨우 버티는 상황이었다.

4학년 마지막 학기가 문제였다. 졸업반인 탓에 더 이상 알바자리를 배정받을수 없었던 것. 오로지 하루하루 먹고사는게 최대 관심사였던 그에게 '돈'은 절박한 현실이었다.

88년 10월 한국전자에 입사, 구미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입사후 그의 삶은 '행복시작'이었다. 침대 숙소를 비롯해 헬스장과 사우나까지 갖춘 기숙사는 그에겐 호텔과 다를바 없었기 때문.

너무나 행복했다. 끼니걱정없고, 잠자리 편한 회사는 그야말로 그에게 해방구이자 간만에 느끼는 안식처였다. 최고의 만족감과 애사심에 불타있던 박윤민은 미친 듯이 일에 빠져든다.

이때부터 그는 다이오드, 트랜지스터 등 개별반도체(디스크리트)를 잇따라 개발하면서 디스크리트 전문가로 발돋음하기 시작한다. 행운은 늘 최선을 다하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법.

그는 반도체연구원 생활을 하면서 반도체연구의 알파부터 오메가까지를 모두 혼자서 처리하는 토탈 프로젝트매니저를 5년간이나 담당한다.

재료연구부터 시작해 CAD설계, 패키징, 테스트 등 전공정을 혼자 처리하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역할을 해낸 것. 그는 이때의 경험을 '천운(天運)'이라고 설명한다. 훗날 큰일을 위해 꼭 필요했던 과정이었던 것.

"제가 만약 대기업 반도체회사에 입사했더라면 특정 공정 한분야를 맡았을것이고, 그 좁은 한분야의 전문가가 돼있었을 겁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별반도체에 관한한 국내 손꼽히는 전문가반열에 올라선다.

하지만 5년간 똑같은 일을 반복하다 보니, 식상해졌다. 더이상 개발자로서 발전할 여지가 없었다. D램시대가 열리면서 박윤민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93년말, 대학동창 모임에 참석했던 박윤민은 16메가D램 얘기에 열을 올리는동창들을 보며 자신이 그렇게 뒤쳐지고, 초라해 보일수가 없었단다.

변화만이 해결책이었다. 기회는 찾아왔다. 당시 흑백 LCD생산업체인 서통LCD를 한국전자가 전격 인수한 것. 인수팀을 통해 LCD를 처음 접한 박윤민은 유리판에 화상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LCD는 시각적으로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마이크로세계에서의 답답했던 느낌이 확 뚫리면서 "이거다"싶은 느낌이 확 다가왔다. LCD에 '필'이 꽂힌 것.이때부터 LCD로 전공을 바꾸기로 마음먹는다.

◆ 국내 최초 COG(Chip On Glass) 개발자, 박윤민

"LCD사업부로 보내주지 않으면 퇴사하겠습니다. 무조건 보내주세요."

93년 구미공장으로 흡수된 LCD사업부의 담당부장은 한국전자 전직원이 LCD사업부로 발령날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터에, 거꾸로 LCD사업부로 보내달라고 떼쓰는 박윤민이 그렇게 기특할 수가 없었다.

당시는 LCD사업은 엄청난 개발비로 적자투성이였다. 박윤민의 놀라운 전투력과 창의적인 잠재력은 이때부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LCD문외한인 그는 제조라인 근무를 자원한다. 공정을 알아야 개발할수 있을 거란 나름의 판단때문. 제조라인을 누비며 닥치는대로 했다.

당시 흑백LCD는 주로 전자손목시계나 계측기용으로 사용됐다. 박윤민은 여기서도 훗날 홀로서기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는 또한번의 기회를 잡는다. 바로 LCD 전공정을 혼자 다 개발한 것.

개별소자때처럼 LCD 또한 개발부터 패키징, 테스트까지 모든 공정을 스스로 혼자 처리하는 토탈연구를 진행한 것. 그는 이를 절묘한 타이밍의 두번째 행운이었다고 술회한다.

LCD 대박제품인 휴대폰의 등장은 박윤민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놓는다.휴대폰, 시티폰이 등장하면서 LCD는 숫자뿐만 아니라, 한글, 그래픽을 구현해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패널에 LCD컨트롤러를 합친 LCD모듈이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것. LCD모듈이 시장을 급속히 대체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얇은 휴대폰에 적합하도록 패널에 구동IC를 장착하면서도 크기를 대폭 줄인 경박단소화가 관건이었다.

국내 LCD산업에 한 획을 긋는 그의 대역사가 이때부터 시작된다. 반도체, LCD 두 분야 공정을 훤히 꿰뚫고 있던 그는 국내 최초로 글라스위에 칩을 실장하는 'COG기술'이란 독보적인 방식을 개발해낸다.

그가 경박단소화의 실마리를 찾은 것은 글라스위에 드라이버IC를 실장하는 기술을 개발한 카시오사의 기술을 논문에서 우연히 접하면서부터.

이때부터 그의 엄청난 완력이 발휘된다. 적자상황에서 회사가 신기술 개발비를 지원해줄리는 만무한 일. 94년, 그는 10억원의 개발자금을 받는 국책과제를 수주, 개발에 착수한다.

COG기술원리만 알고있을 뿐, LCD모듈 재료가 뭔지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다. 수소문끝에 카시오사에 장비를 납품하는 일본 회사를 찾아냈다.

일본으로 날라가 장비구매를 빌미로 이것저것 묻고 귀동냥에 열을 올렸다. 1년여간 모래사장에서 바늘찾듯 하나하나 실타래를 풀어가기 시작했다.

◆ 천당과 지옥사이, 뼈아픈 좌절

"부장님, LCD모듈 화면이 떴습니다. 구동이 됩니다."

95년말, LCD모듈에 화면이 뜨는 순간, 박윤민은 가슴이 터질듯한 벅찬 느낌을 가눌수 없었다. 2년간 고생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정말 한국전자에서 개발한거 맞습니까? 이렇게 두께가 얇은데, LCD가 구동이 된단 말입니까?"

96년봄, 박윤민은 국내 최초로 기판에 구동IC를 실장하는 COG 초경박 LCD모듈 상용제품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일본 카시오에 이어 세계 두번째로 개발한 쾌거였다. 96년 여름, 곧바로 20만개를 양산, 가정에 쓰이는 콜러ID 전화기용으로 미국에 선적한다.

하지만 국내 최초 개발 및 양산의 기쁨도 잠시, 끝내 사고가 터졌다. 급히 양산한게 문제였다. 96년 9월, 수출물량중 3분의 1가량이 불량난 것. 화면줄이 통째로 굵게 표시되는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한 것.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돌아오는 현실앞에 그는 절망했다. 첫번째 맛본 처절한 '좌절'이었다. 양산기술이 왜 중요한지, 품질이 얼마나 중요한지, 제품을 잘못 만들었을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뼈져리게 느꼈다.

악몽같은 한달이 지날무렵, 거짓말처럼 하루아침에 불량사태가 해결됐다.그해 10월, 미 수입회사가 다른 이유로 도산해버린 것. 모든 상황이 한순간에 종료됐다. 하지만 회사에 정나미가 뚝떨어진 상태였다.

COG기술개발로 일약 스타개발자로 떠오른 그는 이미 업계에선 스카우트대상 영순위였다. 오래전부터 제안을 해온 오리온전기로 옮겼다.

컬러 TFT LCD개발에 도전하고 싶었다. 96년 11월, 이직한 그는 개발보다는 마케팅쪽으로 활동무대를 옮기며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 연속된 좌절, 새로운 인연

"여러분, 회사의 구조조정을 이해해 주세요. 조만간 저도 회사를 그만둬야 합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똑 같은 처지입니다."

97년말, 박윤민은 오리온전기 입사 1년만에 구조조정의 칼날에 몸서리를 쳐야했다. IMF가 터지자 회사는 LCD사업을 중단한 것. 한치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자신이 그렇게 무기력할수 없었다. 박윤민은 또한번 좌절을 맛본다.

입사후 영업현장을 누빈 1년간의 경험은 기막힌 타이밍이었다. 그는 고객사 인적네트워크를 쌓는 중요한 기회를 잡는다. 개발자인 그가 마케팅에 나설수 밖에 없었던 것은 기술적인 이해없이는 영업을 할수 없는 LCD특성때문.

"당시는 휴대폰을 생산하는 업체도 LCD에 대해 모르고, LCD모듈을 생산하는 업체도 어떻게 휴대폰에 적용해야하는지 몰라, 서로 답답한 상황이었죠."

기술적 안목이 뛰어난 박윤민은 늘 휴대폰개발자들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해결사였다. 휴대폰에 눈을 뜨기 시작, 시장의 3분의 1을 차지할 정도로 박윤민은 영업에 한창 물이 올라 있었다.

하지만 IMF사태는 순식간에 모든 것을 앗아갔다. 박윤민은 이때부터 6개월간 LCD사업부와 기존 고객사 업무를 대만업체로 넘기고 마무리에 매달렸다. 숱하게 욕얻어 먹고, 용서를 구해야 했다. 견디기 힘들었다.

설상가상, 대만회사가 넘겨준 고객사마다 사고를 쳤다. 불량품이 속출, 고객사에 난리가 난 것. 고객사들은 너나할 것없이 그에게 항의했다. 더러운 꼴 당하기 전에 퇴사, 손을 뗄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묵묵히 6개월간 고객의 항의를 처리해줬다.

마무리가 끝나면 취업할 생각이었다. 기회는 이처럼 우직하게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법인가? 전혀 생각지 못한 행운이 찾아온다.

행운의 여신을 안겨준 사람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리온전기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이 때문에 박윤민을 수도없이 괴롭혔던 고객사 담당자였다.

박윤민, 그는 누구인가?
62년생, 경남 남해출신. 광운대 전자재료공학과졸. 한국전자출신의 개별반도체 전문가. 오리온전기 재직시 COG기술을 국내 최초로 개발한 LCD모듈기술의 대가로 꼽히는 인물. 뛰어난 친화력과 강한 추진력의 소유자.
취 미등산(등산을 통해 자신을 돌아본다).
운동 골프(골프를 통해 '배려'를 배운다)
존경하는 CEO이상완 삼성전자 LCD사업부문 사장
친한 IT맨임덕선 위테크 부사장, 남민우 다산네트워크 사장, 이종진 로렌즈사장, 박진규 아이북랜드 사장
감명깊게 읽은 책Fast Second(콘스탄티노스 마르키데스저.리더스북刊)
10년후 모습유망 신사업을 발굴하고 있을 것이다.

◆ 대폭발, 박윤민의 무한질주

"박 차장님, 대만회사 때문에 문제가 많아요. 차장님이 LCD모듈 사업을 직접 한번 해보세요. 가장 많이 아시잖아요. 차장님이 서포트해주는게 편해요."

사업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그였다. LCD모듈은 무조건 대기업에서 하는 걸로만 생각했기 때문. 하지만 한화, 팬택, 텔슨전자 등 고객사들이 한번도 아니고 서너차례 반복해 사업을 해보라고 제안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수없는 고민끝에 디자인하우스를 설립키로 마음먹는다. LCD모듈설계를 해주면 단말기업체에 도움이 될 것이고, 대충 먹고살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98년 8월, 자본금 5천만원으로 디스플레이테크(DTC)를 설립했다. 구미공장 인근에 사무실을 마련, 직원 2명과 함께 시작했다. 휴대폰업체로부터 실비 개발비를 받았다. 놀라운 사실은 기존 고객들이 양산물량을 주겠다고 제안한 것.

"다른 곳에 발주하는게 아깝다며 계속 독려를 해주더라구요."

하지만 라인구축시 부지, 장비 구입등 최소 10억원이상의 자금이 있어야 했다. 방법이 없었다.하지만 거래처였던 아남정공에서 선뜻 양산을 해주기로 해 오더를 수주할수 있었다.

아남정공은 20억원을 투자, 라인을 구축했다. 텔슨전자로부터 납품승인이 떨어졌다. 일본 마쓰시타에 이어 2순위 공급업체로 선정된 것. 당시 텔슨은 모토로라 ODM물량을 확보, 대박을 터트린다.

DTC직원들은 99년 6월 1만개의 모듈을 구매해준 텔슨전자가 무려 20만개의 오더를 발주하자 입을 다물지 못한다. 마쓰시타의 10만개 물량보다 많은 오더를 수주한 것.

당시 드라이버IC는 세계적인 공급부족사태를 빚고 있었다. 독점공급사인 히다찌의 생산능력이 한계를 맞은 것. 드라이버IC 확보량이 휴대폰 단말기 생산대수와 직결되는 상황이었다.

디스플레이테크가 무려 20만개의 물량을 수주할수 있었던 것은 히다찌사가 박 사장에 대해서는 드라이버IC 공급물량을 대폭 늘려주는 등 전폭적으로 밀어줬기 때문.

오리온전기시절 LCD모듈 판매를 하면서 히다찌사의 드라이버IC를 국내에 소개, 한국시장을 열어주는 역할을 해준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히다찌는 박 사장에게 한글내장 LCD모듈용 드라이버IC를 공짜로 개발해줄 정도였다.

이때부터 박 사장의 질주가 시작된다. 창업 다음해인 99년 140억원의 매출에 12억원의 순익을 기록한데이어, 2000년에는 180억원의 매출에 20억원규모의 흑자를 기록하는 등 처음부터 흑자행진을 시작했다.

2001년에는 250억원의 매출에 40억원규모의 흑자를, 2002년에는 590억원의 매출에 80억원규모의 흑자를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흑자행진을 이어갔다.

8년간 LCD산업에 몸을 담았지만, 회사가 적자를 낸 적이 없었다. 그의 경영수완은 놀라운 것이었다. 흑자비결에 대한 그의 분석은 단순하다.

"핵심 실장기술만 개발하고, 생산은 아웃소싱을 줬기 때문에 적자가 날 일이 없었습니다."

2000년에는 KTB로부터 액면가의 30배수로 40억원, 다음해에는 산업은행등으로부터 100억원대의 투자를 유치하는데 성공한다.

박 사장은 2003년 중대한 분수령을 맞는다. 디스플레이테크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글로벌 기업으로 발돋음하는 결정적 계기를 맞게된 것.

세계 휴대폰시장의 거함, 삼성전자와 모토로라 납품에 성공한 것이다. 디스플레이테크는 이때부터 삼성전자 LCD후공정 외주생산을 개시한다. 패널후공정부터 모듈까지 생산하는 삼성전자 외주공장체제로 전환한 것.

디스플레이테크는 이때부터 폭발적인 양적성장을 시작한다. 2004년에는 매출규모가 처음으로 1천억원대를 넘어섰고, 2005년에는 1천700억원대로 늘어나는 등 초고속 성장세를 이어갔다.

◆ 박윤민의 성공론, 그리고 경영론

2003년, 중국 사스파동을 겪으면 국내 휴대폰산업계는 최악의 상황을 맞는다. 스탠다드텔레콤 등 중견 휴대폰업체와 거래를 한게 화근이었다.

중견 휴대폰업체들의 잇따른 부도로 매출채권이 한순간 휴지조각이 된 것.처음으로 부도를 경험한 그는 중소기업과의 거래가 끝났음을 직감한다.

이때부터 박 사장의 두번째 승부가 이어진다. 지금은 사라진 중견 휴대폰업체들과의 거래를 모두 정리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비난과 항의가 쏟아졌지만, 더 이상 고객사 부도로 인한 앉아서 연쇄부도를 맞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휴대폰시장은 대기업체제로 굳어졌고, 모듈회사 역시 대기업을 뚫지 않고는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있는 매출을 스스로 도려내고, 언제 납품이 될지 모르는 글로벌기업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시장에 대한 진단은 아주 단순하다.

"휴대폰 시장은 이제 노키아, 모토로라,삼성전자 등 세계적 글로벌기업 체제로 굳어진 상황입니다. LCD모듈도 3강에 납품하지 못하면 살아남을수 없습니다."

이제는 부품산업도 규모의 경제에 접어들어, 예전처럼 열정하나로 몇 명이 창업, 도전해 성공신화에 꿈꾸는 시대는 지나갔다고 단언한다.

벤처생태계에 대한 그의 진단은 아주 냉혹하다.

"대기업이 더 잘할수 있는 사업아이템은 벤처기업이 해서는 안됩니다. 무조건 지기 때문이죠. TV와 휴대폰, 자동차는 아무리 중소기업이 잘해도 대기업벽을 넘기 힘듭니다."

그의 성공론은 무엇일까? 첫번째는 '한우물론'이다. 자신이 하고있는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반드시 기회가 온다는 것.

"사실 자신이 직장생활에서 얻지못한 분야에서 할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결국 직장생활을 열심히 하다보면, 기회는 자연스럽게 오는 거죠."

두번째는 '근성'이다.

"실력을 갖춰놓으면 언젠가는 운과 기회가 찾아옵니다. 문제는 기회가 왔을 때 절대 놓치지 않는 근성이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자신도 창업당시 휴대폰시장이 뜨지않았다면, 실패했을 거란다.

직원 1천명 회사 CEO의 조직관리론 노하우는 무엇일까?

"중소기업 임원은 관리형인 대기업 임원과는 달라야 합니다. 핵심 부서장이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직을 슬림화할수 있습니다."

이젠 관리력의 싸움이라고 진단한다. 그는 늘 정도경영을 주장한다. CEO가 투명해야 직원도 투명하게 일한다는 지론이다.

영업과 마케팅측면에서는 고객이 찾아왔을 때 감동할수 있는 인프라를 갖춰놓는게 핵심이란다.

"결국 직원들이 정직하게 일하면서 고객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물건은 팔수가 없습니다."

CEO의 심정과 처지를 이해해줄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다고 설명한다. 아무도 도와줄 사람도 없기 때문에, CEO는 늘 깨어있고, 고민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디스플레이테크 박윤민 사장은 한평생 한 분야를 파고들다, 우연히 찾아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성공기업을 일군 전형적인 벤처창업가이다. 그리고 그는 세계시장을 누비며, 디스플레이테크를 세계 최고 디스플레이모듈 기업으로 발돋음시켜놓은 글로벌 기업가였다.

[인터뷰를 마치며]

박 사장은 디스플레이모듈시장은 계속 될 것이기 때문에,10년이상 안정적으로 발전하는 기업을 만드는게 꿈이라고 합니다.수십년이상 생존할수 있는 핵심아이템을 지속적으로 발굴해보고 싶다고 하네요.

/김광일 객원칼럼니스트(GCM 대표이사) goldpar@gc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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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플레이테크, 어떤 회사인가
설립일98년 8월 20일
자본금45억원
직원수1,000명
연락처www.displaytech.co.kr
사업내역 중소형 디스플레이모듈
경영계획세계 제 1위 디스플레이모듈기업으로 부상
매출목표1,700억원(2006년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