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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FF 화제작 인터뷰]'선희와 슬기'


거짓말로 비극을 맞은 소녀, 두 번째 인생을 살다

[조이뉴스24 권혜림 기자] 여고생 선희(정다은 분)는 관심을 얻고 싶다. 서로 반목하는 부모는 선희의 일상에 무관심하다. 친구 정미와 가까워지고 싶었던 선희는 시선을 끌만한 거짓말을 한다. 아이돌 콘서트 티켓을 구한 경위를 속이는 것으로 시작해 명문대 대학생 오빠와 연애 중이라는 허황된 고백까지, 거짓말의 크기와 빈도는 점점 확장된다.

걷잡을 수 없는 허언들을 내뱉던 선희는 바로 그 거짓말 때문에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가장 가까워지고 싶었던 친구 정미에게까지 외면받았다는 생각에, 선희는 정미가 자신의 반지를 훔친 양 일을 꾸민다. 하지만 행동의 결과는 의도에 그치지 않는다. 선희가 초래한 상황은 정미가 감추고 싶었던 비밀을 예기치 않게 건드리며 비극을 불러온다. 선희는 눈앞의 모든 것에서 도망치는 길을 택한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른 이름으로 다른 삶을 시작하는 길이다.

원치 않게 비극의 도화선이 된 선희는 몰래 서울을 떠나 시골의 보육원에 정착한다. 이 곳에서 선희는 새 이름 '슬기'로 살아간다. 선희의 입으로 말해지는 슬기는 부모가 없고 학교에도 다니지 못한 아이다. 성실하고 친절한 슬기를 보육원의 어른들과 아이들은 모두 좋아한다. 슬기가 된 선희는 더는 관심에 목마르지 않다. 아이들과 부대끼며 지내는 보육원에서 선희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다. 선희에게, 그들이 사랑하는 존재가 자신의 진짜 모습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 보인다.

영화 '선희와 슬기'(감독 박영주)는 거짓말로 주변의 관심을 얻고 또 잃게 된 한 소녀가 어떤 선택지를 향하는지를 가만히 따라간다. 영화의 관심은 점점 불어나버린 거짓말이 언제 어떻게 들통나는지를 기다리는 데에 있지 않다. 물질적 이득을 원하지도, 허영을 전시하지도 않는 소녀 선희가 왜 거짓말이라는 행위로 세계와 관계 맺게 되었는지를 고민한다. 영화의 영제는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했던 삶을 지워버리고 두 번째 인생을, 다시 세 번째 인생을 향해 걷는 선희는 고독하다. 하지만 이내 다시 입을 연다.

영화를 연출한 박영주 감독은 지난 2016년 단편 '1킬로그램'으로 제69회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됐다. 아이를 잃은 엄마의 이야기다. 제13회 미쟝센단편영화제 사랑에관한짧은필름 부문에서 상영됐던 단편 '소녀 배달부'는 14세 소녀의 하루를 담았다. 첫 장편 '선희와 슬기'를 비롯해 전작 단편들에서도 여성과 아이의 삶을 향한 꾸준한 관심이 읽힌다. '선희와 슬기'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장편제작지원작이다.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에 초청돼 첫 관객을 만나고 있다.

이하 '선희와 슬기' 박영주 감독과 일문일답

-경쟁부문인 뉴커런츠에 초청된 만큼 국내외 관객과 게스트들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있을 것 같다.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선희와 슬기'라는 제목에도, 이야기에도 관심을 보이는 분들이 많다."

-영화의 내용은 8년 전 이슈가 됐던 '경주 여고생 실종사건(한 여성이 신분을 속인 채 보육 시설에서 지내며 이중 호적을 취득한 사건)'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는데, 실화를 모티프로 삼은 것인지도 궁금하다.

"실화를 모티프로 했다기보다는, 실제 내가 고등학교 시절 같은 반에서 만났던 친구의 모습에서 착안했다. 굉장히 인기가 많은 친구였는데 1학기가 지나고 2학기가 되니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거짓말이 들통나서였더라. 내내 기죽은 모습으로 다녔던 그 친구와 이동수업을 들으며 옆자리에 앉게 됐는데, 유학 계획이나 집안 환경 등에 대해 허황된 거짓말들을 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 대해 거짓말을 하던 그 친구의 표정이 갑자기 살아났던 기억이 난다. '그건 무엇이었을까?'라는 인간적인 의구심을 품은 채 지냈는데, 대학에서도 그런 친구를 만나게 됐다. 우리는 다 거짓말을 하며 사는데, 특이하게도 자신을 포장하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궁금했다. 한번쯤 해보고 싶은 이야기였다."

-영화를 준비하며 그 마음과 이유를 알게 됐나.

"고교 때 친구는 절실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다. 현재의 상황과는 다른 어떤 것, 자신이 되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을 열망하는 모습이 절실해보였던 것 같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은 친구인데, 왜 불필요한 거짓말을 하면서 사랑받으려 할까'라는 생각에 관심이 갔다. 영화 속 인물은 부모로부터도 관심을 얻지 못하는데, 선희는 사람들과 올바르게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존감이 낮아지고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되면서, 거짓말을 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 같다. 결국 좋은 결과를 맞지 못하지만 말이다. 이름을 바꿔 생활한 도피처에서도 진정한 자신을 보여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선희의 착한 행동들은 '여기선 착한 행동을 하면 사랑받을 수 있어'라고 여기는 '착한 아이 콤플렉스'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충분히 그대로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임에도 서툰 방법으로 친해지길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잘못된 방법이고, 그 자체가 얼마나 비극적인지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 편의 영화를 혼자 끌고간 선희 역 배우 정다은은 굉장한 에너지를 보여주더라.

"배우 정다은은 단편 작업을 위주로 연기를 했던 친구인데, '여름밤'(감독 이지원, 2016)이라는 단편 출연작이 미쟝센단편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 등에서 주목받았었다. 누군가 추천해줘 이 단편을 봤는데 정다은의 얼굴이 무척 깨끗하더라. 연기한다는 느낌보다 자연스럽게 보여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름밤' 당시) 정다은이 중학교 3학년생(2001년생)이었고 너무 어려 캐스팅이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만났는데, 그 사이 많이 자랐더라. 게다가 굉장히 조숙했고 절대 생각이 어린 친구가 아니었다. 과연 선희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지 걱정했는데 대화를 나눠보니 자신의 주관이 또렷했고 오히려 나보다도 인물을 더 잘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고등학교 2학년이다. 나날이 성숙해지고 있다.(웃음)

-거짓말을 소재로 한 영화는 이미 국내외에 많았다. 다른 이야기를, 다르게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을 것 같다.

"굉장히 고민이 많았다. 무엇보다 가장 어려운 것은 '왜 거짓말을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나 '리플리' 같은 영화에서 많이 다뤄온 주제였기 때문이다. '나는 왜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나' '나는 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가' '다른 영화와 다르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려 노력했다. 선희의 거짓말은 이해받기 어려운 면이 있을 수 있다. '리플리'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블루재스민' 등 여러 영화 속 인물의 욕망은 잘 알려져 있는 성격의 것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만났던 그 친구는 허영심을 채우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관심과 인간관계에 대한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것 역시 또 다른 허영일 수 있지만, 본질이 다르다고 느꼈다. 그래서 '온전히 인간으로서 사랑받고 싶은 욕구', 그 자체에 주목하고 싶었다. 그것이 (다른 인물들과 비교해) 선희의 다른 면이 아닐까."

-부산국제영화제에 첫 초청된 소감도 궁금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2014년에 관객으로 영화제에 놀러온 적이 있다. 영화를 시작하기 전이니, 이렇게 큰 영화제는 처음이라 신기해하며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2년 뒤 단편 '1킬로그램'으로 칸국제영화제에 초청됐을 땐 오히려 얼떨떨했다. 그런데 부산에 초청되니, 관객으로 와 본 적도 있고 (영화로 초청돼) 가보고 싶었던 영화제여서 굉장히 기쁘더라.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선희와 슬기' 상영을 했는데, 스크린도 크고 화면의 색감도 너무 좋아 마치 새로운 영화를 보는 느낌이었다. 내 영화이니 이미 나는 1만 번 정도 봤을텐데도 말이다.(웃음) 그 자체가 감사하고 좋은 경험이었다. 나는 잘 긴장하지 않는 편인데, 영화의전당 상영 때는 내내 가슴이 쿵쾅거렸다. 처음으로 이 영화를 사람들에게 보여준다는 생각에 기분 좋은 떨림을 느꼈다."

-영화 작업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청소년기엔 미술을 하고 싶었다. 만화책을 좋아해서 고등학교 때 잠깐 미술을 배웠는데 선을 하나 긋는 순간 내가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재능이 있는 친구들은 선을 하나 그어도 다르더라.(웃음) 당시 열등감도 많이 느꼈고, 노력도 많이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미술로 지원한) 대학에 다 떨어져 미술을 포기하고,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다는 것을 떠올리며 '글을 배워볼까' 가볍게 생각했었다. 이후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입학했고 시나리오를 전공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또 잘 쓰는 친구들이 너무 많은 거다. 난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데 주변에선 등단도 하고, 작가도 되니까 '난 할 줄 아는 것이 뭘까'라는 고민을 아주 오래 했었다. 지금은 그 과정도 내가 하고 싶은 것,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 걸렸지만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나 스스로 좋아하는 일(영화)을 만났다고 생각한다."

-'선희와 슬기'를 비롯해 이전 단편 작업물에서도 여성과 아이의 삶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사실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도 촬영했는데 작업이 잘 되지 않아 필모그라피에선 찾을 수 없게 됐다. 단편의 경우 세밀한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짧은 시간 안에 해야 하기 때문에 여성인 내가 가장 잘 알 수 있는 이야기,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려다보니 자연스럽게 여성 주인공의 영화를 하게 됐다. 그리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내 모든 영화에 아이들이 나오더라. 아이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치유받는 느낌이 있다."

-앞으로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궁금하다.

"나는 감정적인 것, 자기 안의 트라우마에 관심이 많다. 그게 어쩌면 나의 테마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만들고 보면 다 그런 이야기더라. 주인공이 성장하거나 트라우마를 극복하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기도 한다. 앞으로도 인물 안의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 같다. 인물의 감정들을 살펴보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는 범죄 실화 바탕의 이야기다. 주인공은 여성인데, 그 역시 자기 안의 어떤 것을 이겨나가는 인물이다. 상업영화, 장르영화를 무척 좋아한다. 관객들이 재밌게 보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영화는 내 인생 자체에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줬다. 영화를 보면서 '세상은 살만하구나' '사실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라는 생각들을 하게 됐다.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빌리 엘리어트'다. 보고 나서 기분 좋은, 긍정적인 힘을 주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꿈이다. 언젠가 만반의 준비를 해서 코미디 영화 한 편은 꼭 만들고 싶다.(웃음)"

-코미디라니, '선희와 슬기'나 단편의 분위기와는 매우 다른 목표라 의외다.

"내 안에 수많은 내가 있다. '선희와 슬기'는 사랑받고 싶은, 결핍된 나를 꺼낸 작업이고 그것을 보여준 영화다. 다른 면에선 즐거운 내 모습도 보여주고 싶다. 어떤 이야기를 쓰든 솔직하게 쓰려고 가장 많이 노력하는 편이다. 어떤 것이든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나로부터 출발하게 되는 것 같다. 영화는 솔직하게 나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배우들도 그렇겠지만, 감독 역시 영화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지 않나. 앞으로도 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려 한다."

-감독 박영주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은 어떤 의미인가.

"영화를 만드는 과정 중 99%가 힘든 것 같다. 너무 너무 힘들고 때로 견디기가 버겁다. 그런데 그 나머지 1%에서 '말도 안되게 재밌어. 이렇게 재밌다니!'라고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 1%를 위해서 99%를 견디는 것 같다. 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느낌도 있다. 내 안의 결핍 때문인지, 영화를 만드는 일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나를 잘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그냥 이 일을 잘 해보자'라고 생각한다.(웃음)"

조이뉴스24 부산=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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