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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혜림]비극이 잠식한 사회, '한공주'의 한 줄기 희망


17세 소녀의 성장기, 비통한 사회에 무엇을 남길까

(기사에는 영화의 엔딩과 관련한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권혜림기자] 비통한 시국, 관객수가 반토막이 난 극장가에서 조용한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영화가 있다. 이수진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천우희가 주연을 맡은 '한공주'다. 개봉 5일 만에 7만 관객을 돌파하며 관객몰이 중이다. 저예산 영화로는 고무적인 흥행 성적이다.

'한공주'는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친구를 잃고 쫓기듯 전학을 가게 된 공주(천우희 분)가 새로운 곳에서 아픔을 이겨내고 세상 밖으로 나가려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또래 청소년들의 집단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기억을 가진 주인공은 다시금 장벽에 맞부딪힌다. 인물을 바라보는 정제된 시선과 섬세한 연출, 배우의 출중한 연기가 만나 수작으로 완성됐다.

영화는 사건을 둘러싼 어른들이 "잘못한 게 없는" 17세 소녀 한공주를 내몰며 시작된다. 가해자의 학부모들과 학교의 교장, 사건을 취조하는 형사와 공주의 아버지까지, 누구 하나 소녀를 보살피지 않는다. 피해자인 공주는 큰 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고향을 뜬다.

떠밀리듯 전학한 공주는 전 학교 담임 교사(조대희 분)의 어머니 집에 얹혀 살게 된다. 여전히 공주의 곁에 온전한 어른은 없다. 공주의 생활에 가깝게 개입해 있는 담임 교사에게선 그나마 잔정이 느껴지지만 굳은 책임감까진 관찰되지 않는다. 지원금을 받고 공주를 집에 들이는 '선생님 어머니' 조여사(이영란 분)는 소녀와 차츰 교감을 쌓는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가 공주를 구원하진 못한다.

가해 학생들이 유죄 판결을 받은 뒤에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돈을 받고 가해 학생 측 탄원서에 딸의 사인을 받아내는 아버지(유승목 분), 새 학교에 찾아와 소녀의 일상에 또 한 번 균열을 일으키는 가해 학생의 학부모들, 떠나는 공주에게 납득 못할 요구를 하는 파출소장(권범택 분)까지, 제각기 이해 관계에 얽힌 어른들의 세상에 선하고 여린 생명이 발 붙일 곳은 없다.

영화 속 공주와 함께 끔찍한 기억을 안고 있던 친구 화옥(김소영 분)은 결국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화옥의 고민을 모른체했던 공주는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생각에 버거워한다. 한공주는 조여사와 파출소장의 앞에서 화옥을 향한 자신의 죄의식을 처음으로 꺼내보인다. 강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다리 위로 향하기 직전의 일이다.

공주의 꿈은 25m 수영장을 헤엄쳐 완주하는 일이다. "물에 빠지면 죽으니까, 25m 딱 그만큼만 가 보고 싶"다고 말한다. 영화의 엔딩에서는 "왜 그렇게 수영을 열심히 해?"라는 물음에 "다시 시작해보고 싶을까봐. 내 마음이 바뀔수도 있으니까"라고 답하는 공주의 목소리가 내레이션으로 들린다.

이는 언제든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다는 의식인 동시에, 혹시 모를 순간에도 제 삶을 돌보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비극적 사건 앞에 속수무책 내던져진, 그래서 각자가 호신술을 익혀야만 하는 불안 사회의 징후로도 해석된다. 영화 속 이야기라고만 넘기기엔 현실감이 너무나 짙다.

지난 17일 개봉한 영화의 흥행은 대한민국을 비극으로 몰아넣은 16일 여객선 세월호 침몰 참사와 그 시기가 맞물려있다.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의 서사에서 지금의 비극을 떠올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끔찍한 사건 이후 친구를 보내야 했던 공주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생존자다. 자신을 지켜줘야 할 어른들로부터 위로도 보살핌도 받지 못한 공주의 고군분투는 현실 속 참사 생존자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사건 이후 이들은 거대한 사고의 기억에 압도됐을 터다. 사건에 직접적으로 얽히지 않은 국민들에게도 비극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전국민이 '세월호 트라우마'에 노출돼 있다는 진단도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한공주'는 희망을 말한다. 감히 '힘을 내 살라'고 소리치진 못하지만 강에 뛰어들어 물살을 가로지르는 소녀의 몸짓을 담담히 응원한다. 다리를 뛰어내린 순간의 정적, 화면을 뒤덮었던 절망감은 곧 옅은 희망이 된다. 생명을 담고 서서히 떠오르는 사람의 몸체, 자의로 움직이는 작은 몸짓이 여린 삶을 향한 존중으로 펼쳐진다.

17세 소녀의 삶을 비추며 그를 옥죄는 폭력, 이 사회의 구조적 모순까지 짚은 '한공주'는 보기 드물게 깊은 고민을 남기는 수작이다. 희망적인 영화만이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제대로 희망을 말하려는 영화는 좋은 영화여야만 한다. 비극이 잠식한 사회, 관객들은 '한공주'에서 한 줄기 희망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이뉴스24 권혜림기자 lima@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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